10일이라고 했다. '벌레가 무섭다'며 먼저 산을 내려가겠다고 한 아이는 실종된 지 열흘을 보낸 다음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진 끝에 간신히 발견되었다.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활자에 다 담을 수 없는, 그 두렵고도 아득한 시간이 어땠을까. 구조된 아이는 그 시간 동안 대부분 자거나 누워있었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딱히 먹을 음식이나 물이 없었는데도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마침 쏟아진 장맛비는 생명수여서, 아이의 기갈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육군 32사단 기동대대 박상진 상사는 군견 달관이와 함께 최초로 아이를 발견했을 때, 아이의 생존만으로 감격스러워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에도 인터뷰마다 '아이가 살아있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동안 이 문장 앞에서 먹먹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있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흉흉한 소식이 나부끼는 차갑고 건조한 세상에 내리는 가느다란 비처럼 내 마음을 연약하게 건드렸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 공감능력이 특별히 예민해서라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타인의 안녕에 그만큼 무관심한 곳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처마다 편만하게 깔려있는 죽음의 일상에 이제는 둔감할 대로 둔감해져서, 더 이상 둔감해질 겨를 없는 사회여서. 그래서 '열흘을 걸려 겨우 도착한 아이의 소식이, 냉혹한 땅에 간신히 푸른 싹을 돋아낸 여린 순 같아 뭉클해진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조금 했다.

<엑시트> 용남과 의주가 무사히 살아 돌아가길 바라게 된 건...
 
 영화 <엑시트> 스틸컷

영화 <엑시트> 스틸컷ⓒ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엑시트>를 보는 동안 나는 종종 옆길로 샜다. 영화가 의도한 것인지 내가 의도적으로 연결한 것인지는 몰라도, 영화의 진행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경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기를 멈추고, 스크린 밖의 현실에서 서성였다.

독성가스가 건물을 타고 올라오는데도, 그곳으로부터 나갈 길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보습학원의 청소년이라든가. 끝이 아마득한 타워 크레인으로 올라가 삶(구조)을 요청하는 장면이라든가. 이런 장면들은 우리 사회가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일을 기어이 다시 불러내 관객과 마주 보게 만든다. 두 장면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는데, 이 설정이 이상하게 무척 위로되었다. 그토록 간절했던 소망을, 영화가 대신 성취해준 것 같아서였을까. 그저 그들의 안녕이, 삶이 감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산출해낸다고 말한다. 카타르시스란 헬라어로 '정화' 또는 '배설'이라는 뜻인데, 극을 보며 관객의 감정이 순화되거나 정신적 불순물을 밖으로 내보낸다는 의미다.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객이 극 중 인물에 자신을 투사해서,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게 필수적이다. 즉 저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영화 <엑시트>에서 용남(조정석 분)과 의주(임윤아 분)의 목표는 명확한데, 그건 바로 죽을 뻔한 위기로부터 살아남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극 중 인물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절실한 목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두 입장(관객-인물)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서, 거의 일치됐을 때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엄밀히 말해, 문학이나 영화라 할지라도 우리는 타인과 완전히 일치된 감정을 갖기가 불가능하므로, '거의'라고 표현한다. 카타르시스는 언제나 간신히 도달한 '거의'라는 지점에서 찾아올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용남과 의주가 무사히 살아 돌아가길 바랐을까.

어느 날 들려온 '살았대!'라는 소식이 그토록 고마운 이유
 
 영화 <엑시트> 스틸컷

영화 <엑시트> 스틸컷ⓒ (주)외유내강, CJ엔터테인먼트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순간은 그 사람의 '있음'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없음'을 발견하는 시점이라고. '없음'을 다른 말로 결핍이라고 해도 좋고, 결여라고 해도 좋다. 대부분의 사람은 매끈하게 완결된 사람보다 어딘가 결핍이 있어서 불완전한 사람에게 매혹된다. 그 '없음'을 내가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없음을 채워주고 싶은 사람 역시, '없음'에 가까운 사람이다. 나의 '없음'이 너의 '없음'을 알아보면서 그러다가 깨닫는다. 너의 '없음'은 나의 '없음'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이입하고, 가까스로 타인의 내면까지 가닿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용남과 의주의 '없음'이란 곧 '생명'일 텐데(물론 둘의 생명이 결핍되진 않았지만, 생명이 위태롭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들의 생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나는 간절하게 바라곤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용남이 목숨을 잃게 된다면 누구보다 고통스러워 할 아버지, 어머니의 떨린 목소리를 들었을 때 더욱 절박해졌다.

목숨을 건질 기회가 올 때마다 번번이 타인의 목숨을 먼저 챙기는 아들의 선함을 때려서라도 말리고 싶지만 그래선 안되고, 또 그렇게 해도 듣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무력하게 다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부모님의 등을 봤을 때. 이런 순간들은 그들의 '없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내 준다.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지도. 이런 순간들에서 내 마음은 일렁거린다. 너의 '없음'을 내가(나의 '없음'이) 알아본 순간이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의 내면에 비로소 '거의' 다가선다. 용남과 의주가 제발 살아남기를. 무사하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없음'을 채워줄 수 없으므로, 한계 안에 갇힌 간절함만 속절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너의 '없음'이 채워지기를 빌며.

그래서 눈물겹도록 감사했을까. 어느 날 들려온 '살았대!'라는 소식이 그토록 고마운 이유가. 아버지(박인환 분)는 무사히 돌아온 아들 용남을 향해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말하며 눈물 흘리고, 모두가 체념할 무렵 끝내 발견한 소녀를 향해 '살아있어서 고맙다'라고 말한 육군 박상진 상사의 말까지.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내가 채워주지 못한 너의 '없음'을 기적처럼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채워주었으므로,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그런 것처럼, 사람들은 그 앞에서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며 깊숙이 감사를 표하는 걸까.

깊고 아득한 밤에서, 글을 쓰면서 문득 떠올랐다. 아무리 무거워도 묵묵히 자기 생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이들이, 그 속에서 감탄하고 놀라워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이, 이 도시의 안녕이. 잠든 그들에게 감사드린다.
 
 영화 <엑시트> 포스터

영화 <엑시트>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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