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건드렸다고 하세요."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말한다. 사귀는 것을 반대하는 엄마의 허락을 받기 위해 둘이 잤다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한 외삼촌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을 해명하려는 남자에게 호통을 친다. 여자를 건드린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냐면서.

위 상황의 시대적 배경을 유추해볼 수 있겠는가? 30년 전? 20년전? 사회의 빠른 변화 속도를 감안할때 '2010년 정도?'라고 답했다면 틀렸다. 바로 지난주에 내 눈으로 목격한 상황이다. 

탈코르셋 운동이 일어나고 < 82년생 김지영 >이 1년 이상 베스트셀러인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라고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 나온 장면이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속 막내딸이 자신이 좋아하는 편집장에게 자신을 건드렸다고 말하라고 하는 장면. 배경 음악으로는 경쾌한 음악까지 흘러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속 막내딸이 자신이 좋아하는 편집장에게 자신을 건드렸다고 말하라고 하는 장면. 배경 음악으로는 경쾌한 음악까지 흘러 나왔다.ⓒ KBS


여기서 당신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를 건드린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말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만약 당신의 어린 자녀가 그 뜻을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지.

네이버 국어사전에 '건드린다'를 치면 3가지 뜻이 나온다. 1)조금 움직일 만큼 손으로 만지거나 무엇으로 대다 2)상대를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기분을 나쁘게 만들다 3)부녀자를 꾀어 육체적인 관계를 맺다. 혹시 모를까봐 알려주는데 드라마에서 말한 '건드리다'는 3번 뜻이다.

즉, 드라마 장면 속 여자는 순진한 자신이 응큼한 남자의 꼬임에 넘어간 만큼 남자가 자신을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잤으니 남자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식의 논리도 어이없지만 주로 가족들이 보는 주말 시간대에 방송되는 드라마에서 상스럽고 여성에게 모욕적인 '건드린다'란 단어를 썼다는 점이다.

만약 현실에서 어떤 여자가 "저 남자가 나를 건드렸어요"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 성폭력으로 고소할 사건이지 드라마에서처럼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건드리다'는 성감수성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여성의 성적대상화를 지양하는 현 시점에는 적절하지 않은 단어다. 만약 대본이 그렇게 나왔더라도, 제작진이 반드시 걸러냈어야 할 단어이기도 하다.

KBS 주말드라마는 상징성이 있다.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이 가족 단위로 즐겨 보는, 화목한 가정을 주제로 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가족드라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검증된 작가와 인지도가 있는 배우들로 구성되어 시청률 30%는 기본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이런 드라마에서 아직도 남녀관계에서 여성의 수동성이 강조되고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단어가 버젓이 사용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우리 사회엔 '건드려야' 하는 문제들이 많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혹시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단어인 만큼 '건드리다'라는 단어를 여자에게 쓰는 것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인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아무 욕이나 쳐봐라. 상스러운 욕이라도 그 뜻이 아주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사전에 욕이 나온다고 하여 일상에서 욕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방송에 나온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자를 건드린다는 표현이 욕보다 덜 상스럽거나 덜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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