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를 상대로 한 출판사에서 제기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은 개봉 전날인 지난 23일 기각됐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영화 <나랏말싸미>는 책 <훈민정음의 길-혜각존자 신미 평전>(저자 박해진)의 2차 저작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신미 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는 주장은 <훈민정음의 길> 출판 이전부터 존재했으므로, 이 배경 설정은 아이디어나 이론에 불과해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에도 박해진 작가와 박 작가의 저작권을 대리하고 있는 도서출판 나녹은 여전히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고 있다. 또 최근 영화를 관람한 박 작가는 영화 속 천도재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월인천강지곡'의 노랫말이 자신이 번역한 문장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기각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 결과는 영화 <나랏말싸미>가 책 <훈민정음의 길-혜각존자 신미 평전>의 저작권을 침해했는지 여부를 판단한 것으로, 노랫말은 당시 판단 대상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5일, 조계종 주최로 열린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 특별기획 세미나'에 참석한 박해진 작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적은 '월인천강지곡'을 현대어로 번역했고, 당시 이를 인쇄한 발표문을 배부했다.   

새롭게 불거진 '월인천강지곡' 번역문 표절 논란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의 원문. ⓒ 월인천강지곡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문장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번역된다.
 
부처님 하신 일을 말씀드릴 것이니,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일이지만 눈에 보는 듯이 여기소서 / 부처님 하신 말씀을 사뢰리니,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 여기소서
 
다음은 박 작가가 2016년 번역해 발표한 문장(위)과 영화에 '조철현 작사'로 표기된 가사(아래)다.
 
세존 일 여쭈려고 하니 만 리 밖 일이오나 눈에 보는가 여기소서
세존 말 여쭈려고 하니 천 년 전 말이시나 귀에 듣는가 여기소서
(박 작가 번역문)
세존 일 여쭈리니 만 리 밖 일이오나 눈에 보는가 여기소서
세존 말 여쭈리니 천 년 전 말이시나 귀에 듣는가 여기소서
(영화 가사)
 
소유격 조사 '의'가 빠지고, '여쭈려고 하니'를 '여쭈리니'로 줄인 것 외에는 차이가 없다. 

번역문의 저작권 발생 여부에 대해 한국저작권위원회 법률상담관은 "번역문도 2차 저작물이기 때문에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다"면서 "저작권은 무방식주의로 특별히 어딘가에 등록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작권법 10조 2항에 의거, 번역한 순간 자동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또 "법원이 표절 여부를 따질 때는 의도성이 있었는지, 원저작물에 접근이 가능했는지, 실질적으로 유사했는지 등을 따져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해진 작가는 "해당 문장이 발표된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주최 세미나에는 조철현 감독도 참석했다, 이 문장이 인쇄된 초록을 내가 직접 감독에게 건네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영화 <나랏말싸미> 제작사 측은 "세종대왕이 쓰신 '월인천강지곡'을 조철현 감독이 현대적 언어로 바꾼 것이며, 조 감독이 해당 작업을 할 때 연출팀과 함께였다. 일반적인 해석문을 참고해 노래에 어울리게 편집한 것"이라며 박해진 작가의 주장을 부인했다.

<나랏말싸미>, 처음엔 <훈민정음의 길> 원안 인정했다  
 
 15일 오후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영화 <나랏말싸미> 시사회에서 조철현 감독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나랏말싸미>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든다는 목표를 위해 뜻을 함께한 세종과 불굴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5일 오후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영화 <나랏말싸미> 시사회에서 조철현 감독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나랏말싸미>는 오로지 백성을 위한 문자를 만든다는 목표를 위해 뜻을 함께한 세종과 불굴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 이정민

 
<오마이뉴스>는 이 외에도 박해진 작가와 도서출판 나녹, 영화사 두둥 오승현 대표, 조철현 감독 등이 2018년 만나 나눈 대화 녹취록과 두둥 측이 나녹에 보낸 원안 계약서, 박해진 작가가 '원안'으로 명시된 1차 시나리오 등을 확보했다.
 
우선 가처분신청 재판 당시 나녹과 박해진 작가가 법원에 제출한 책과 시나리오의 동일 부분은 총 일곱 곳이다. 그중 하나가 극 중 신미대사(박해일 분)의 "주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다. 주인 되어 떠나는 나그네만 있을 뿐"이라는 대사다. 책 <훈민정음의 길> 표지 안쪽 저자 약력 소개글에 "훈민정음과 함께하는 주인 되어 떠나는 나그네"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박 작가는 "내가 순수하게 창작한 문장을 차용했다"며 표절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저작권위원회 법률상담관은 "짧은 문장은 저작권으로 보호하지 않는다. 과거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한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라는 대사에 대한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짧은 문장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는 이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해진 작가가 15년에 걸쳐 취재하고 조사해 밝혀낸 부분에 대한 것들이다.
 
이에 대해 김기태 교수(세명대 미디어창작과, 전 한국저작권위원회 표절위원회 위원)는 "역사적 사실의 저작권은 만인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독자적으로 발굴해냈다 하더라도 발굴자에게 저작권이 주어지지는 않는다"라며 "역사적 사실에 어떤 사람만의 독창적인 해석과 창의력이 더해져야 저작권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출판사와 저자가 제기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기각' 결정, 하지만 
 
 영화 <나랏말싸미> 1차 시나리오 표지. '원안 박해진'이 표기되어 있다.

영화 <나랏말싸미> 1차 시나리오 표지. '원안 박해진'이 표기되어 있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하지만 법원의 판단 이후에도 나녹과 박 작가 측은 계속해서 '원안'을 주장하고 있다. 법의 테두리에서 표절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영화의 많은 부분을 책에서 차용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작가는 "영화에서 세종이 '나는 공자를 내려놓고 갈 테니, 너는 부처를 내려놓고 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신미가 '저는 부처를 타고 가겠습니다. 전하는 공자를 타고 오십시오' 하는 대사가 있다. 이건 내가 <훈민정음의 길>을 마무리하면서 신미 스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가정하에 쓴 글을 따온 것이다(639쪽). 오랜 연구에도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스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말해주시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써 내려간 글인데 왜 나의 창작물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무엇보다 박해진 작가와 출판사 나녹 측은 조철현 감독이 먼저 박 작가에게 원안자로서 시나리오 자문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영화사에서 출판사에 원안계약서를 보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감독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는데, 왜 이 부분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박 작가는 30차례 이상 조철현 감독과 이송원 각본가 등을 만나 자문해줬고, 박 작가의 또 다른 직업인 고건축물 사진가라는 장기를 살려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영화에 등장하면 좋을 사찰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 작가는 이를 대가로 자문료를 받았고, <나랏말싸미> 엔딩 크레디트에 '자문'으로는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자문료와 원안 인정은 별개의 일"이라는 입장이다. 

박 작가는 "내 책을 원안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에 자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과외 해주듯 취재한 내용을 설명해줬고, 영화에 등장할 사찰을 추천해주고 사전 답사까지 같이 다녔다"고 말했다.

또 "감독이 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들었다는 부분은 스스로 인정했다. 제작사도 받아들였기 때문에 원안 계약을 제안한 것 아닌가. 이제 와 이러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발된 원안계약서 보니 
 
박 작가의 <훈민정음의 길> 저작권을 대리하고 있는 출판사 나녹 형난옥 대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형 대표는 "<훈민정음의 길>은 박해진 작가와 내가 오랫동안 고생해 만든 책이지만, 너무 두껍고 어려워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는 힘든 책이었다. 그런데 감독이 먼저 원안을 제안했고, 우리는 영화를 통해 책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저 이 책이 영화 <나랏말싸미>의 원안이 된 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면, 그를 통해 책을 홍보하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2018년 4월 영화사 두둥이 나녹에 보낸 원안계약서에도 원안 인정 이후 추가적으로 원안료를 지급한다거나, 영화로 인한 수익에 출판사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부분은 없었다. 원안 인정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박해진 작가에게 이미 지급된 자문료 4천만 원으로 갈음하고, 박 작가는 자신이 받은 4천만 원 중 일부를 출판사에 제공하겠다는 내용에 동의했다.
 
형 대표는 "영화 제작사가 보내온 원안 계약서 내용에 불만을 품거나, 추가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제작사의 계약서 내용 그대로 계약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배급사에서 원안 계약 체결에 반대한다면서 계약 진행이 어렵게 됐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말했다.

영화사 대표 "책, 영화의 원안도 원작도 아니다"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이에 대해 영화사 두둥 오승현 대표는 "엄밀하게 말해 <훈민정음의 길>은 영화 <나랏말싸미>의 원안도, 원작도 아니다. 법적으로나, 통상적인 기준으로나, 무엇으로 보나 영화와 책은 별개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원안 인정에도 반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조철현 감독은 오랜 시간 신미 대사를 연구해온 박해진 작가의 노력을 존중해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감독의 의사를 존중해 원안자로 인정하고 계약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안 계약은 영화 제작사 측의 일방적인 통보를 끝으로 불발됐다. 오 대표는 "처음 박해진 작가에게 자문받을 때는 출판사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박 작가가 원안 계약은 출판사와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출판사가 논의에 참여하게 됐다. 조철현 감독과 박해진 작가, 형난옥 (나녹) 대표, 나, 중재자로 나선 동출 스님, 이렇게 모여 계약서에 대한 내용을 다 합의했는데, 계약서를 전송하고 나니 '절차상의 미숙함(출판사와 처음부터 논의하지 않은 것)을 문서로 남겨라. 그게 계약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더라. 반성문이라도 쓰라는 말인가 싶어 굉장히 불쾌했다"고 말했다.
 
또 "원안으로 인정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만, 순전히 감독의 선의와 감독의 의사를 존중하려는 나의 선의로 원안 계약을 하려 했다. 그런데 반성문을 문서로 남기라니. 이건 내 자존심과 영화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서로 남은 기록을 저쪽에서 악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굳이 이런 불안감과 의심, 불쾌함까지 안고 원안 계약을 할 이유가 없었다. 배급사와 감독도 그렇게 설득해 계약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형난옥 대표는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절차상의 실수가 있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영화를 상대로 표절을 제기한 출판사들이 많지만,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진 예가 없다고 들었다. 출판인들이 느끼는 표절의 기준과 법이 인정하는 표절의 기준 사이에 분명한 온도차가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형난옥 대표는 "최근 조철현 감독이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입장문을 내면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일의 어려움과 가치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 이 영화의 취지'라고 했더라. 그런 분이 한 사람이 15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저술한 책의 크레디트를 영화에 박는 일을 그리 어려워하셨다는 게 아이러니다. 훈민정음창제사에 '신미기여설'이 처음 영화로 만들어지는 만큼 서로 협력해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왜곡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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