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영화 <로마의 휴일> 포스터

영화 <로마의 휴일> 포스터ⓒ Paramount Pictures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자 패션의 아이콘이기도 한 오드리 헵번에게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기품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이름에서 배우,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보다 더 큰 것을 읽는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찍을 당시 오드리 헵번은 무명의 신인배우였으나 상대역을 맡은 그레고리 펙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 중 하나였다. 또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윌리엄 와일러는 이미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1959년 <벤허>로 세 번째 감독상을 수상, 총 세 번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소위 믿고 보는 감독이었다.

크레딧에는 이안 맥리핸 헌터가 작가로 올라있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것은 당시 매카시즘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자신의 이름으로는 글을 쓸 수 없었던, 그럼에도 수많은 예명으로 쉬지 않고 히트작을 쓴 최고의 작가 달튼 트럼보였다. 이 화려한 드림팀의 이름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우리가 기억하는 <로마의 휴일>은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Paramount Pictures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 속에서 유럽 주요 도시들을 순방 중인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마지막 도시 로마에 이르러 그동안 참아왔던 답답함과 지루함을 토해낸다. 창밖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도시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로마의 여름밤을 즐기고 있는데 자신은 거대한 방 안에 갇혀 다음날의 일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속상하다. 그녀의 투정이 히스테리로 이어지자 주치의는 진정제가 들어간 주사를 그녀에게 놓는다.

평소 같으면 금방 잠이 들었겠지만 밖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때문일까, 공주는 시종들 몰래 거대한 궁전을 빠져나오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로마 시내를 흥분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늦은 밤, 미국인 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벤치에 쓰러져 잠든 앤 공주를 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그녀를 자신의 방에서 재운다. 다음날 신문사에 출근해서야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모든 일정을 취소한 앤 공주라는 것을 알게 된 조는 특종 기사를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공주와 하루를 보낸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Paramount Pictures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해 본 적이 없는 앤은 태어나 처음으로 공주로서의 책무를 잊고 보통 사람들에겐 평범한 일상이나 그녀에게는 모험과 다름없는 특별한 하루를 보낸다. 조는 자신의 동료인 사진기자 어빙과 함께 폭로 된다면 왕실의 망신거리가 될 에피소드들을 차곡차곡 쌓아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앤을 기사거리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앤 역시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하루를 선물해준 조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공주의 짧은 일탈은 만 하루로 끝을 맺는다. 앤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궁으로 자진해 돌아가고, 조는 고민 끝에 앤 공주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지 않기로 결심한다. 공주와 기자의 신분으로 기자회견장에서 재회한 두 사람. 앤은 조가 그의 신분을 속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듯 보이지만 그와 주고받은 진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한 기자가 순방 도시 중 어느 곳이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공주에게 묻는다. 그녀는 연습한대로 모든 도시가 각자의 매력이 있다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멈추고, 로마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이들이 주고받는 악수와 눈빛은 그 어떤 애정 신 보다도 로맨틱하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Paramount Pictures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공주와 한량기질이 다분한, 특종기사로 한탕 해보려는 기자가 그 이름만으로도 특별한 로마에서 함께 보내는 하루는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하는 장르 영화의 무리한 도전을 무색하게 만드는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인 <로마의 휴일>을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은 감히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이는 다른 고전 명작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동화와 현실의 적절한 조합이 돋보이는 데다가 어디 하나 빈 틈을 찾아 볼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추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신인 여배우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인데, 이 영화가 가져온 성공과 이 영화 안에서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매력을 생각하면 백번이고 수긍 가능한 수상이다.

관능적인 배우들이 각광을 받던 당시 할리우드에서 발레리나처럼 깡마른 오드리 헵번(그녀는 실제로 무용수로 활동했었다)의 등장은 신선한 것이었다. 보호본능을 불어 일으키는 가냘픔과 애가 타는 무지, 천진함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무엇도 침범하지 못할 순수함과 우아함을 가진 앤 공주 역할에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부합했고(그녀가 실제로 유럽 어느 나라의 공주라고 해도 전혀 의심이 가지 않을 정도다.), 영화사 전체를 통틀어, 지금의 젊은 배우들을 포함한다 해도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Paramount Pictures

 
<로마의 휴일>이후로 10년 동안 그녀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들(<사브리나>, <화니 페이스>, <파계>,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등)을 살펴보면 캐릭터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우나 처음부터 그녀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녀의 존재감이 영화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은퇴 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활동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오드리 헵번은 대중들의 사랑을 넘어 존경을 받는 배우가 되었다. 암 투병 중에도 소말리아를 방문해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 타인에게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녀의 영화를 통해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영화가 존재하는 한,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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