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하나레이 베이> 메인포스터 영화 <하나레이 베이> 메인포스터

▲ 영화 <하나레이 베이> 메인포스터영화 <하나레이 베이> 메인포스터ⓒ (주)디오시네마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문학계의 거장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다. 그는 장편과 단편을 포함해 수많은 작품을 썼지만, 이를 영화화하는 데 있어서는 관대하지 않다. 소설 < 1Q84 >가 흥행했을 때도 수많은 프로듀서들이 영화화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가와 신지 프로듀서는 그런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영화로 제작한 인물이다. 영화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 성공한 것만으로 그는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오가와 신지의 필모그래피는 국내 관객들도 익숙한 작품들로 가득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물론이고, <메종 드 히미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양지의 그녀> <나라타주> <화장실의 피에타> 등이 있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좋은 작품을 발굴, 제작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몸을 담고 있던 회사가 소규모였기에 소위 '작은 영화'들만 노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좋은 영화'를 고르는 안목을 얻게 해주었다고 말이다. 겸손의 미덕이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오가와 신지의 노력이 곳곳에 녹아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도쿄기담집>에 수록된 동명의 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화장실의 피에타>를 연출하며 현재 일본에서 주목 받는 젊은 감독 가운데 하나인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영화의 스토리상 대부분의 촬영이 하와이 호놀룰루가 자리한 오아후섬의 동쪽, 카우아이섬 북쪽에 자리한 하나레이 베이에서 로케이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오가와 신지 프로듀서의 경험과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재능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2.

영화는 이기 팝(Iggy Pop)을 대표하는 곡 가운데 하나인 'The Passenger'와 함께 시작된다. 그냥 슬쩍 듣기에는 흥겨운 곡이지만, 사실 이 곡은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을 설명하는 가사들로 이루어진 곡이다. 어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곧장 들려주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곡과 함께 등장하는 영상의 어두운 초연함 같은 감정이 영화 포스터 속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여인의 모습과 오버랩되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필요한 것이 전체적인 분위기의 암시와 관객들의 호기심을 건드리는 일이라면, 이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한 곡의 음악으로 두 가지 모두를 해낸 셈이다.

이 묘한 느낌은 다음에 등장하는 시퀀스와 연결되며 그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사치(요시다 요 분)가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극 중 엄마 사치(요시다 요 분)는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으로 떠난 아들 타카시(사노 레오 분)가 서핑 중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로 향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느껴지던 약간의 서늘함과 긴장감의 진짜 모습이 이 부분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차가운 영안실 내부,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금속 베드 위에 누운 타카시의 시신 다리 한 쪽은 상어에 물어 뜯겨 처참한 모습이다. 사치는 미동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영화의 초반부 시퀀스들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 장면에서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연출 방식이 정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연출방식이란 '압축과 생략'이다. 다른 유사한 작품들은 극의 긴장감을 발생시키고 이야기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고 발생 장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곤 하는데, <하나레이 베이>에서는 그런 걸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런 장면들을 과감히 삭제하거나, 가벼운 수준의 점프 컷(Jump Cut)을 통해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벗어나 버린다. 여기에서의 생략은 '일부를 뺀다'는 의미보다는 '일부를 줄인다'는 것에 가깝다. 전체의 흐름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설명과 장면들을 줄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출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3.

이 영화에서 도입부, 그러니까 사치의 이야기가 '10년 후'로 넘어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 방식이 중요한 까닭은 이 작품이 오롯이 사치의 모습과 감정에 집중되어 있는 영화라는 것을 말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도록 장치된 인물이 있기 마련이고, 그와 별개로 특정 관계에 분산되어 책임이 전가된 인물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방식을 통해 극 중 이야기의 레이어가 쌓이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하나레이 베이>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사치의 감정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표현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활용되는 존재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만큼은 그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다른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히 '누군가의 상실'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아들을 가진 엄마의 상실'로 이야기를 끌어 나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역행적 상실(일반적으로 자식에 선행해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과 반대라는 뜻)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과정 이후에는 다시 한 번 '상실의 대상을 오롯이 사랑하지 못했던 이의 모습'으로 점차 쪼개어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상실의 감정을 단계적으로 짚어내는 작업이 이 영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오열하는 사치의 모습에 관객들은 숨을 멈추게 된다. 영화 마지막 지점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은 관객을 사로잡으며 이 작품을 완성시킨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4.

사치는 하와이에서 두 소년 타카하시(무라카미 니지로 분)와 료(쿠리하라 루이 분)를 만나게 된다. 이들을 표면적으로 보자면, 사치로 하여금 아들의 존재를 다시 찾아 헤매게 만드는 인물이다. 이들은 사치에게 '외다리 일본인 서퍼'의 존재에 대해 처음 이야기 꺼낸다.

두 사람은 사치가 내면적으로 마음을 다해 아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드는 대상이기도 하다.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그러면서도 바다와 서핑을 사랑하는 타카하시가 특히 그렇다. 그녀는 생전 아들 타카시와 비슷한 나이대의 타카하시를 만나 (아들과 하지 못했던) 친근한 시절을 잠시나마 함께 보낸다. – 두 소년과 함께 파도를 형상화한 천 아래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장면을 보면 영화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짓는 배우 요시다 요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 웃음은 아마도 그의 아들에게 지어주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아들의 상실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일은 상실 그 자체로도 깊은 상처가 되지만, 만약 그 상실의 단초가 되는 행위를 직접 한 일이 있거나 그 이전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부채가 남아 있는 상태라면 그 상처는 더욱 커지게 된다. 상실이라는 것은 곧 대상의 부재를 뜻하고, 그 대상과 본인 사이에 남겨진 해결되지 못할 것들을 모두 홀로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듯 사치가 아들인 타카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는 남편의 몫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아들이 기억도 나지 않는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핏줄, 숨길 수 없는 유전적 요소들이 엄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사치에게 있어서는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아들이라는 존재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아니, 해소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찰나에 그의 상실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기 팝의 음악 'The Passenger'가 흘러나오는 카세트에 농축되게 된다. 이 음악은 극 중 사치의 남편이 남기고 간 카세트를 아들이 기어코 꺼내어 들은 것이기도 했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5.

이 영화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장면을 하나 고르라면, 역시 후반부에 등장하는 모래사장 장면이다. 일본인 외다리 서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하나레이 베이의 모래 사장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장면. 이 장면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들의 죽음을 이미 확인한 엄마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들의 생존을 믿고 싶어하는 간절함 혹은 단 한 번이라도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듯한 염원과 같은 심정이 잘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권유에도 아들의 마지막 핸드 프린트 유류품을 찾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녀가 적극적인 몸짓을 보이는 순간인 것이다. 이 해석을 따르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다만, 여기에는 조금 더 세밀한 구조화가 숨겨져 있다.

이 영화에서 '경계'는 생각보다 더욱 심오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경계는 삶과 죽음의 관념적 경계이기도 하고, 바다와 모래 사장이 만드는 물리적 경계이기도 하며, 파도를 형성하고자 하는 바다의 수면과 이미 덮쳐오고 있는 파도 사이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적 경계이기도 하다. 이 경계는 단순히, 거기에 있기에 장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감독의 의도에 따라 구조화되어 의미를 전달한다. 가령, 아들일지도 모르는 일본인 외다리 서퍼의 이야기를 들은 사치가 모래사장을 헤매는 장면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그녀가 모래를 밟지 않도록 의도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해안가 너머의 풀숲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아들 타카시가 죽은 장소가 바닷속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녀가 아들을 찾아 다니다 처음으로 바다에 발을 담그는 장면에 – 이 장면은 영화의 메인 포스터로 선정된 장면과 동일한 장면이다. – 이르기까지 직접 바다에 몸을 담그지 않는 까닭과도 동일하다. 그러니까, 사치에게 있어 언제나 머물던 푸른 숲의 공간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이고 바다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역과도 같으며, 그 중간 영역을 흐르는 모래사장은 두 지점을 잇는 강 '레테'와도 같은 게 아닐까. 그녀가 그런 영역에 직접 뛰어들어 아들을 찾아 헤매고 바다에까지 발을 담근다는 뜻은 '간절함'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이 작품에서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이 '경계'를 활용하는 방식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인 <환상의 빛>에서도 후반부의 롱테이크 장면,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의 공간에 정확히 맞춰져 놓인 장례 행렬을 통해서도 비슷하게 표현된 바 있다.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주)디오시네마


06.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후반부에 터지는 사치의 감정을 향해 모든 감정적 여력을 응축시키는 작품이다. 감독의 의도대로 사치가 아들의 상실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나름대로' 해소하고 마침내 어떤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관객들 역시 어찌할 바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절정에 해당하는 그 지점의 장면까지 이야기를 잘 직조해낸 감독의 역량과 홀로 극을 이끌다시피 한 요시다 요라는 배우의 대단한 내공이다. 특히, 요시다 요는 이번 작품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혼자서도 타이틀 롤을 감당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혹은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소설을 읽으며 두 가지 버전의 '하나레이 베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감독은 자신이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이유로 '이 작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때문에 원작의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꼭 살리거나 없애겠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티브는 활용하되 자신 스스로를 원작에서 거리를 두게 만드는 작업을 선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원작의 어떤 부분은 축소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감독만의 시선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어 이야기를 빈틈없이 채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 가운데서도 어떤 이는 이미 그런 경험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현재 경험하고 있거나, 또 어떤 누군가는 그런 경험을 앞으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상실의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일에 드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연출한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의도처럼, 영화 속 사치의 마지막 표정처럼, 나는 우리 모두가 상실을 겪고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영화가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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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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