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좌완 선발 류현진이 5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린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다이아몬드백스와의 방문경기에서 7회를 마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좌완 선발 류현진이 5일(한국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린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다이아몬드백스와의 방문경기에서 7회를 마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LA 다저스 류현진은 지난 11일 LA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1실점으로 또 한 번 역투했다. 아쉽게 불펜이 실점하면서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9차례 연속, 시즌 11번째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 류현진은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 전체 투수들 가운데 다승(9승), 평균자책점(1.36)과 탈삼진을 볼넷으로 나눈 비율(15.40) 등 7개 항목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스타의 탄생은 새로운 것을 유행시키곤 한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때, 한국 야구 팬들 사이에서 '체인지업'이란 변화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면 현재 류현진 덕분에 유행어가 된 야구 개념은 '보더라인 Borderline'이다.
 
가끔 야구 경기를 보면,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간 공을 보며 해설자가 감탄하는 경우가 있다.

"저런 공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아요."
"저런 공을 치지 못한 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다른 공을 노려야죠."


이런 탄성을 자아내는 공이 바로 보더라인에 들어간 공이다. 류현진의 공은 정말 날카롭게 스트라이크존의 경계를 노린다. 그런데 단순히 보더라인을 노리는 것만으로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메이저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내기 힘들다. 류현진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현재 4개의 구종을 모두 보더라인에 꽂아 넣기 때문이다.

100구당 구종가치를 기준으로 류현진의 포심패스트볼은 메이저 전체에서 7위, 투심패스트볼은 5위, 커터 5위, 체인지업 6위, 커브 56위를 기록하고 있다. 커브를 제외한 4개 구종이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구종 가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공을 다양한 위치에 던지면서도 올 시즌 전체를 통틀어 볼넷을 5개 밖에 내주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메이저리그의 야구는 지난 몇 년 간 급속도로 진화해왔다. 빌 제임스라는 야구광이 고안해 제시한 '세이버매트릭스'란 개념의 도입 이후 야구는 이전과 다른 스포츠가 된 것 같다. 초기 그의 제안은 통계적으로 보다 정확히 선수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노력이 성과를 거둬, <머니볼>이란 영화의 탄생이 가능했다.

타율, 방어율과 같은 고전적인 지표는 OPS, 출루율, FIP, WAR과 같은 생소한 언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 제임스의 제안만 하더라도, 고전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투수가 던진 공의 실밥까지 관찰 가능한 Pitch-f/x란 기록 기술이 도입 된 이후 야구는 다시 한 번 변했다. 스피드건으로 측정한 구속만이 객관적인 지표였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분석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기술의 발전으로 투수에게는 '구속' 뿐 아니라 '움직임(movement)' 또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움직임으로 야구계를 호령한 투수는 최근 류현진의 활약으로 자주 호출되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투수 '그렉 매덕스'다. 그의 공은 빠르지 않았지만, 현란한 움직임으로 타자를 압도했다. 일본의 야구스타 오타니 쇼헤이가 160km의 공을 던지지만, 공의 움직임이 약해 공략이 어렵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Pitch-f/x를 통해 가능해진 '구속'과 '움직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은 야구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구종과 볼 배합, 땅볼유도 능력 등 고전적인 야구의 지표는 측정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구위'는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배제하고, 확실한 정보에 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많은 메이저리그의 구단들, 즉 사업가들은 구위형 투수를 영입하는데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구위가 좋은 선수는 많은 삼진을 잡을 수 있다. 컨트롤이 좋지 못해, 타자가 공을 치기 편한 스트라이크 존 중앙에 공이 몰리더라도 움직임과 파워로 히팅포인트를 방해하는 게 가능하다. 한동안 구위는 투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2013년. 그 역시 '구위'를 중심으로 메이저리그의 선수생활을 준비한 듯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류현진은 자주 95(152km)마일의 공을 던지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한국에서 류현진은 속구,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를 고루 던지는 4피치 선수였고 여기에 최고 구속을 152km까지 낼 수 있다면 메이저에서도 충분히 성공 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하지만 공인구의 차이였는지 또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한국에서는 강력했던 변화구가 메이저에선 통하지 않았고, 2013년 류현진은 실질적으로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2가지 구종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2피치 선수였다. 이 시기 류현진의 공은 지금과 같이 보더라인을 집요하게 노리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있게 강한 공을 뿌리는 파워피처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 역시 '구위'를 중심으로 한 메이저리그의 투수 트랜드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2013년에는 새로운 구종을 익힐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류현진은 체인지업이 분석 당해 좌타자에게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2014년. 새로운 구종 습득을 시도한다. 유명한 클레이튼 커쇼의 고속 슬라이더와 조쉬 베켓의 너클 커브를 1주일 만에 익혀 실전에서 써먹기 시작 한 것이다. 이 중 커쇼의 슬라이더는 2014년 내내 체인지업을 대신해 류현진의 주무기가 되었다.
 
이후 어깨 부상으로 2년의 공백기를 가진 류현진은 야구에 대해 뭔가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야구를 쉽게 했지만,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몰리는 메이저리그에서는 보다 진지하게 야구를 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겠다고 생각한 듯 했다.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메이저리그의 트랜드인 '구위'를 포기하고 피네스 피처(기교형 투수)로 거듭나는 전략을 세웠다는 것이다. 몸을 회복 한 후 커터를 장착한 류현진은 2018년부터 다양한 구종으로 집요하게 보더라인을 공략하는 태도를 보인다. 포심패스트볼, 체인지업, 커터. 그리고 여기에 은근슬쩍 투심패스트볼을 더하더니. 체인지업과 커터는 종방향과 횡방향으로 변화를 줘서 던진다. 리그 정상급의 다양한 공이 특정한 패턴 없이 스트라이크존의 경계선을 왔다갔다하니 타자 입장에선 환장 할 노릇이다. 이게 타자입장에서 얼마나 겁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투수들이 패턴을 만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투수에게 가장 위험한 3볼 상황을 가정해보자.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되면 '볼넷'을 내어주게 된다. 베이스에 공짜로 타자를 내보내게 되고, 투수의 투구수는 늘어난다.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투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기 마련이다. 이때 자신 있는 공이란 가장 익숙한 위치에 가장 위력적인 공을 던진다는 뜻이다. 패턴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타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투수의 투구 패턴이 예상되면, 그 다음에는 전략을 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류현진은 아무리 불리한 볼 카운터라도 특정한 패턴을 보이지 않고 4개의 구종을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던진다. 까딱하면 볼넷으로 주자를 쌓기 쉬운 투구스타일이지만, 류현진의 볼넷 비율은 2019년 현재 메이저 역대급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상대팀에서는 공략법을 짜는 게 힘들어진다.
 
트랜드는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길이다. 류현진은 구위를 포기하고 구종의 다양성과 제구를 선택했다. 쉽지 않은 시도였을 것이다. 부상 이후 류현진은 '변화'를 선택하는 과정을 <류현진의 MLB일기>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데뷔 첫 해부터 MVP를 수상한, 언제나 자신감 넘쳤던 완성형 투수 류현진에게서 그 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불안감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체력관리부터 전력분석, 구종습득 능력, 그리고 제구력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류현진은 변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는 올 시즌 류현진이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기록들이다. 불안을 꾹 누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했더니, 어느 순간 주위에 경쟁자들이 사라지고 혼자 달리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구위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집착도 이젠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기록기술이 다시 한 번 발전했기 때문이다. 최근 메이저리그의 기록방식은 Pitch-f/x에서 '스탯캐스트'라는 보다 진화 된 기술로 대체되었다. Pitch-f/x가 투수의 손에서 포수의 글러브나 타자의 배트에 도달하는 순간까지를 기록한다면, 스탯캐스트는 타구가 공에 맞은 이후 움직임. 타구속도에서 발사각도까지, 그리고 수비수의 움직임을 포함 야구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볼 기록은 '타구속도'와 '발사각도'다. 타구 속도가 최소 98마일, 해당 속도에서 발사각이 26°~30°가 될 때 가장 높은 타율과 장타를 기록 할 수 있다는 '배럴타구'란 개념이 스탯캐스트의 자료를 통해 제시되었다. 배럴타구가 타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면 역으로 배럴타구를 억제하는 것 또한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기존의 세이버매트릭스가 무시해온 '땅볼유도 능력', '범타'와 같이 수비를 거쳐 발생한 아웃카운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기존의 세이버매트리션들은 탈삼진, 볼넷, 피홈런과 같이 오직 투수의 힘으로 통제 가능한 요소만을 놓고 투수의 역량을 측정하는 FIP이란 지표를 개발했다. 하지만 FIP은 투수가 삼진 뿐 아니라 범타에 관여하는 기여도를 측정하지 못한다. 스탯캐스트의 등장 이후, 투수가 만들어내는 타구질을 더해 xwoba와 같은 새로운 지표들이 나타나고 있다.
 
Pitch-f/x의 시대에 관찰 가능했던 건 구위였다. 덕분에 메이저리그는 구위형 투수로 넘쳐나게 되었다. 하지만 스탯캐스트의 시대에는 타자의 타구질을 흔들 수 있는 투수의 역량이 모두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투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전히 높은 탈삼진능력, 낮은 피홈런/볼넷능력은 투수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라는 걸 류현진이 증명하고 있다.

류현진은 구위가 빼어나지 않음에도 다양한 구종과 완벽한 커맨드로 돌파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스타일의 S급 선수. 뭔가 모순적인 선수가 되어버렸다. 류현진은 지금 메이저리그의 패러다임의 시프트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는 선수 중 한명일 것이다. 그렇다고 류현진이 다른 투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롤모델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흥미는 있어도 이건 어려울 것 같다. 류현진 같은 재능을 가진 투수가 쉽게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다. 
 
류현진에 대한 미국 현지의 야구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그의 '투구는 재미있다'고 입을 모은다. 구위를 중심으로 재편된 현대 야구에서 보기 힘든 볼배합, 타자와의 전략 싸움, 정교한 커맨드 등. 사라진 투수의 전통 중 하나가 재현되고 있는 것 같은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며, 현미경 수준으로 정교해진 오늘날 야구의 분석 시스템도 잡아내지 못하는 변화무쌍함에 경의를 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부터 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아온 야구팬들은 메이저리그의 천재들과 경합하며 마음껏 기량을 뽐내는 '노력하는 천재'의 각성 그 자체가 볼거리일 것이다. 요즘 그의 야구는 정말 재미있다.
 
 20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 파크에서 열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원정경기에서 류현진이 선발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20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 파크에서 열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2019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원정경기에서 류현진이 선발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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