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대목 중 이런 부분이 있다.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 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면이 곧 지면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글 짓기를 건축에 유려하게 빗댄 그는 글 짓기에 있어서 지켜야 하는 준칙도 설명한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그렇다. 나는 지금 영화 <안도 타다오>를 보고 '안도 타다오'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건축학과 글 창작을 잘 모르면서도, 이 대목이 떠오른 것은 '글짓기'를 건축에 빗대어 한 그의 말이, 자리를 바꾸어 '건축'을 글 짓기에 빗대어서도 얼마간 상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좋은 글이 그렇듯 좋은 건축물은 '인식을 생산'해 내고, '적합한 재료'로 지어지며 '공학적'으로 아름답다는, 이 셋을 필연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를, 기하학으로 단순성의 미를 즐겨 사용하는 안도 타다오의 건축에 대해 둘째(적합한 재료), 셋째(공학적으로 배치)를 대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첫째(인식을 생산)는 무엇일까.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어떤 방식으로 인식을 생산하는 걸까. 그러기 위해, 신형철이 말하는 '인식'이 무엇인지 조금 더 들어보자.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좋은 건축물이 되기 위한 요소들

좋은 건축물이란 모름지기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라는 것. 이 문장에 생략된 단어를 넣으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곳에) 있을 만하고 또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건물'.

이 선언은 두 가지 의미를 낳는다. 첫째, 좋은 건축물이란 숱한 건물과 구별되는 '바로 그 건물'만의 개체성을 갖춘 것.('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건물') 둘째, 좋은 건축물이란 그 지역 배경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맥락성을 갖춘 것('그곳에 있을 만한 건물').

종합하면, 건물의 '개체성'은 지역 배경의 '맥락성'과 합쳐져 하나의 건축물로 완성되고, 그렇게 완성된 건축물은 그냥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특정한 (예술적) 인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고베의 로코 하우징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고베의 로코 하우징 ⓒ (주) 라라아비스, 영화사 진진

  
​​​​​​그렇게 생산된 인식은 무엇일까. 건물의 개체성과 맥락성을 포개면, '건물의 지역성'이라는 인식이 추출된다. 현대 건축 비평가인 K. 프렘턴(K. Framton)은 안도 타다오를 '일본에서 지역성을 가장 의식하고 있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실 안도 타다오의 모든 건축물은 그 자체로 응당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성'이란 의미와는 달리 반경이 굉장히 넓은 개념이어서, 오래전부터 바로 그 지역이 간직한 역사, 구성원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같은 것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서의 지역성'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속해있는 곳이 거대한 자연인 지구라는 의미로 '넓은 의미로서의 지역성'을 뜻하기도 한다. 

고베의 로코 하우징(Rokko Housing)은 대지가 약 60도 정도 기울어진 가파른 경사면에 지어진 집합 주거 단지인데, 안도 타다오는 건축을 위해 대지를 평지로 만들지 않고, 가파른 경사면을 그대로 둔 채로 건축물을 지어 올렸다. 이점은 그곳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보존하면서(좁은 지역성), 동시에 가파른 경사면의 자연 역시 훼손하지 않으려는(넓은 지역성) 그의 뚝심이다.

"건축이란 터를 읽는 일이에요. 이 터를 본 순간 공원을 어떻게 집어넣을까 생각했어요."

교토의 '우츠보 공원의 집'(2007-2010)을 가리키며 한 말은, 그가 '지역성'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사다. 그는 실내에 테라스를 두어, 그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우츠보 공원의 경치를 담았고(좁은 지역성), 시시각각 건물로 스며드는 빛의 농도, 각도, 색채에 따라 같은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도록 내부의 공간을 배치했다(넓은 지역성). 빛, 물, 바람, 나무 등 그의 건축물에서 이러한 자연적인 요소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안도 타다오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이유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교토의 우츠보 공원의 집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교토의 우츠보 공원의 집 ⓒ (주) 라라아비스, 영화사 진진

    
"롱샹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빛으로 홍수가 난 듯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빛을 추구하기만 해도 건축이 가능하다고 가르쳐주는 듯했다."

빛으로 홍수가 났다는 그의 표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연과, 세계 앞에 선 그의 태도가 어떤지 전달됐기 때문이다. '빛의 교회', '물의 교회', '물의 절'을 포함해서, 그의 초기 건축물인 'Azuma House'까지, 그는 늘 꽉 막힌 건물 안으로 빛과 바람이 언제든 스며들도록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빛, 물, 바람, 나무는 그에게 단순 '배경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엄연히 물성을 갖춘, 또 하나의 건축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보고 정체 모를 경외감 혹은 숭고함을 느낀다면, 그가 먼저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어떤 경로로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대지 위에 건물을 지어 올리는 건축가의 겸허함 같은 것을 느낀다. 건물은 인공적인 재료로 지을 수 있지만, 건축은 자연의 도움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그렇게 믿어온 장인의 말씀 같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자연친화적을 넘어서, '자연 경외적'이라 할 정도인 그는 왜 주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했는가이다. 콘크리트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재료이며, 낮은 공사비로 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다 노출 콘크리트가 가진 잠재성을 발견했다고. 거푸집을 만들고, 그 안으로 콘크리트만 부으면 어떤 형태든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만들고 싶은 공간을 더욱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노출 콘크리트는 내부, 외부가 하나의 일체로 구성돼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재료의 '실체'는 추상화되거나 옅어지며, 어떤 '공간'이 내부를 감싸는 듯한 '공간 체험'이 극대화된다. 또한 다른 재료가 함께 쓰였을 때 일어나는 시선 분산, 부분적 표현이 부각되는 것을 막는 효과도 갖는다. 재료로서의 '실체'는 사라지고, 무언가의 '공간'만이 감싸는 듯한 감각. 이때, 공간으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 등의 '자연성'은 더욱 강조된다. 그러므로, 안도 타다오에게 둘째 조건(적합한 재료)은 필연적으로 '노출 콘크리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건축을 포함한 예술의 본질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지추 미술관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지추 미술관 ⓒ (주) 라라아비스, 영화사 진진

  
​​​​​​이제, 좋은 건축물의 셋째 조건(공학적으로 배치)을 살펴볼까.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그의 건축물은 정방형, 원형 같은 순수한 기하학 형태를 적극 사용한다. 사실 자연은 유기체적이어서, 질서가 특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비 질서'라고 한다면, 기하학적인 그의 건축물은 그곳에 '질서'를 부여시킴으로써, '비 질서-질서'를 상호 대립시키고자 한 셈이다.

대립은 긴장을 일으키는데, 그 긴장이 신선한 공간감을 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건축물 내부로 들어가 볼까. 외부가 '비 질서(주변 경관)-질서(건축물)'의 긴장이라고 한다면, 내부는 '질서(정방형)-질서(원형)'의 긴장이다. 내부를 엄격하게 완결된 '원형'과 '정방형'으로 구성하면, 각각은 '확정적인 공간'이지만, 그 둘이 맞닿는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미확정적인 틈새 공간'이 생긴다. 의도적으로 긴장을 일으켜 내부의 깊이감과 역동성을 부여하려고 한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의 글로 안도 타다오 건축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논리 전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건축, 문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로서 예술의 좋음은 본질적으로 같은 거라고, 나는 믿는다. 순서를 바꾸어도 좋다.

적합한 재료를 사용해, 공학적으로 배치된 예술은 우리에게 하나의 인식을 전해준다. 인식을 전달받은 우리는, 다시는 그 예술을 접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삶에 무심히, 그러나 단호히 그어진 '좋은' 예술의 선은 우리를 이전과 전혀 다른 우리로 만든다. 그로 인해 우리는 비록 더디지만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각각의 '나'라는 또 하나의 건축물을 지어 올리는 중이다. 좋은 예술(적합한 재료)을 사용하여, 삶을 정돈시켜서(공학적으로 배치), 그렇게 지어진 '나의 삶'을 목격한 타인에게 또 하나의 인식을 생산해주도록. 지금 나는 나를 짓는 중이다.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빛의 교회'

영화 <안도 타다오> 스틸컷. '빛의 교회' ⓒ (주) 라라아비스,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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