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포스터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밀리언 달러 호텔(The Million Dollar Hotel)>은 새 천년이 시작된 지난 2000년에 개봉된 영화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영화는 독일 영화 감독 빔 벤더스의 작품목록 상단에 위치해야 하지만 대중적인 열광을 얻어내기는 힘든 작품으로 보인다.

'천사'의 사랑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의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며, <베를린 천사의 시>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무책임한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대충 뭉개지는 않는다. <밀리언 달러 호텔>에는 <베를린 천사의 시>와 달리, 명시적으로 천사가 등장하지 않기에 '천사의 사랑'이란 표현이 과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사랑의 천사', 혹은 '사랑이란 이름의 천사'가 나온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밀리언 달러 호텔>의 무게 중심이 상대적으로 사랑에 더 기운 것이 사실이니까.

추락한 천사는 악마일까

천사의 족보에서 루시퍼 같은 이는 타락한 천사로 그려진다. 만일 <밀리언 달러 호텔>에 천사가 등장한다면 타락한 천사는 아니고 아마도 일그러진 천사일 것이다. 혹은 완악한 인간들이 복작대는 지상에서 버텨내기엔 너무 여린 성정을 지녀 곧 배제되고 마는 존재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얼핏 추리물로 보인다. 번화한 거대도시, 미국 서부의 심장이자 번영의 상징인 로스앤젤레스의 뒷골목에 자리한 '밀리언 달러 호텔'이 영화의 무대이다. 영화는 이 호텔 옥상 장면에서 시작해 옥상 장면으로 끝난다. 한때 호텔 이름에 부합할 정도의 명성을 누렸지만 지금은 쇠락하여 부랑아나 다름없는 사회의 부적응자나 주변인이 투숙객으로 호텔에서 생활한다.

허름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밀리언 달러 호텔'에 어느 날 투숙객인 이지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며 영화의 스토리가 가동된다. 이지 같은 일개 마약 중독자의 추락사는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곧 잊히기 마련이지만 사망자가 유태계 언론 재벌의 아들임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스키너(멜 깁슨 분)라는 FBI 요원이 등장하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밀리언 달러 호텔'은 일약 핫플레이스로 부상한다. 처음에 이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간주한 스키너는 투숙객 중에 살인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한다.

추락사의 전모를 드러내고 범인을 찾는 과정을 드러내기에 분명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끝까지 본 사람에겐 전혀 다른 유형의 영화라는 인상이 자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살인이지만 살인이 아니고, 자살이지만 자살이 아니라는 사건의 성격과,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주인공이 무고하지 않다는 사실이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그렇다고 죄인은 아니라는, 의미의 모호화와 존재의 중층성이 이 영화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스틸컷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스틸컷ⓒ CJ 엔터테인먼트

 
만일 이 영화에서 천사를 찾아야 한다면 당연히 주인공인 톰톰(제레미 데이비스 분)이 유력한 후보이다. 극중 톰톰은 이 호텔에서 '거지의 집사'로 불린다. 시인이자 마약중독자인 이지의 친구인데, 캐릭터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지적장애아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세상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경쟁에서 도태되고 따라서 패배자가 될 확률이 높다. 더불어 인지능력에는 이해(利害)파악이 포함되는데 톰톰은 사건과 상황에서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톰톰은 패배자들끼리 꾸미는 음모에서 희생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거부하지 못한다.

그러나 톰톰의 요청 수용이 꼭 이해파악 능력의 결여에서 비롯하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재벌의 아들(이지)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한탕을 노리는 호텔 투숙객들의 계획이 좌초할 위기에 처하자, 우선 그들의 계획을 돕고 싶었을 것이고, 다음으론 자신이 이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서 희생양을 자처하였을 수 있다. 톰톰에게 이해파악 능력이 없었다기보다는 이해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리라.

맨 마지막에 밝혀지듯, 이지의 죽음에 개입하는 까닭 또한 절반은, 자기살해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지에 대한 동감, 나머지 절반은 사랑하는 여인 엘로이즈(밀라 요보비치 분)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살인인지 자살방조인지 구분되지 않는 톰톰의 행위는 무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위가 자신의 이익을 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구(無垢)야말로 천사의 속성이다. 그런 연유로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면 세상에 그의 집을 찾기는 힘들다. 무구하지는 않지만 무해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밀리언 달러 호텔' 같은 곳이 그나마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천사의 집이 아닐까. 그러나 이지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의 풍진이 이곳에 몰려오면서 천사의 집은 파괴되고, 세상에서 자기 집을 잃은 천사는 본래 자기 집이 있던 곳으로 떠나야 할 운명에 처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손을 흔들고 추락하는 톰톰에겐 하늘 자리가 예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허위의 세상에서 꿈 꿀 수 있는 진실

벤더스는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 천년의 도래를 맞이하여 새로운 세대가 동감할 수 있는 러브 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또한 아주 고전적인 정서를 이끌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을 민감하게 끌어안으면서도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이야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모두에 밝혔듯 사랑 이야기이지만 사랑 이야기로 끝낼 마음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명을 기준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새롭게 상상해 보면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시>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크게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 물론 방향이 반대임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오지만, <밀리언 달러 호텔>에선 인간이 천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주제의식의 경향에서도 차이가 난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독일 전후세대가 느끼는 민족의식, 혹은 시대에 대한 부채감,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 모종의 엄숙주의 같은 것이 전편을 적신다면, <밀리언 달러 호텔>에선 세계시민적인 방만함, 비판정신을 온전히 하는 가운데 부가된 신좌파적 인식영역의 확대, 존재의 포스트모던한 해석 혹은 전시 같은 것이 뒤섞여 있다.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스틸 컷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스틸 컷ⓒ CJ 엔터테인먼트


따라서 등장인물이 판이해진 건 불가피했다. 천사를 논외로 하더라도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는 곡예사와 형사 콜롬보에 이어 호메로스까지, 고전적 캐릭터가 등장한다. 반면 <밀리언 달러 호텔>에서는 당장 '베를린 천사'들과는 격이 다른 바보 톰톰이 등장한다. 톰톰이 '천사'가 될 운명이긴 하지만, 우아한 웃음과 그야말로 천사다운 몸짓을 보여주는 '베를린 천사'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속한다. 전직 천사인 피터 포크의 형사 콜롬보에 대비되는, 종국에 톰톰과 같은 부류로 판명 나는 멜 깁슨의 FBI 수사관. 그나마 여기까진 비교가 가능하지만 나머지 <밀리언 달러 호텔>의 캐릭터들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신은 백인이다"라고 외치는 인디언 제로니모(지미 스미츠 분),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이자 해마라고 주장하는 록 가수 딕시(피터 스토메어 분), 죽은 이지가 자신과 결혼하려 했다는 허위 주장을 고집하는 비비안(아만다 플러머 분) 등 모두가 잡다한 주변부 인생이다. 심지어 엘로이즈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지상에서는 이들 모두 톰톰과 같은 사회적 계급/계층에 속한다. 이들과, 로봇 같기도 하고 백치 같기도 한 FBI 요원이 재벌가 아들의 추락사를 둘러싸고 그려내는 삶의 요지경은 아이러니로 점철된다.

영화가 그리는 세상은 이분법적 세상이고 분열은 확고하지만 분열선은 미궁으로 그려진다. '밀리언 달러 호텔'과 같은 주변부 삶과 이지가 떠나온, 그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주류의 삶이 대조를 보인다. 억압자로 등장한 FBI 요원과 그를 적대시하는 '밀리언 달러 호텔' 사람들. 소동의 중심이 되는 타르 그림은 제로니모가 그린 것이지만 시장에서는 이지의 작품이 된다. 게다가 그 타르화마저 그 이면에는 다른 진본 그림이 깔려 있다. TV는 이 영화에서 다루는 중요 소재다. 같은 사건이 TV와 현실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사건의 의미는 변색된다. 자살과 타살, 현실과 상상, TV가 그린 세상과 TV 밖의 날것의 세상. 수없이 많은 이분법이 모호한 분열선을 그리며, 때로 그 분열선이 뒤섞이며 영화를 끌어간다.

초반부에 FBI 요원과 대화하며 이지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자살일 수가 없다고 단언하며 그 이유로 "유태인은 자살없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인데 믿으면 현실이 된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실재가 된다고 말한다. '밀레니엄 달러 호텔' 사람들은 "우리는 믿을 준비가 됐어"라고 말한다.

문득 이 영화가 끝내 사랑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벤더스가 톰톰을 통해서 영상화한 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고, 믿을 준비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도 아니며, 그저 믿는 것이며 그것도 전존재를 걸고 의혹 없이 믿는 것인데,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가장 온전한 의미로서 사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