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에서 집필을 개시한 <목민심서>에서 다산 정약용은 "재해가 지나간 뒤 어루만져 주고 편히 모여 살게 하는 것 역시 목민관의 어진 정치다(其害旣去, 撫綏安集, 是又民牧之仁政也)"라고 말했다. 재난 당한 백성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상처에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목민심서>는 1818년 완성됐다. 이로부터 2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는 '재난당한 백성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한다'는 다산의 말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 지원만 제공하면 국가의 역할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나마 물질적 지원도 충분치 못하지만, 그 정도만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4월 3일 개봉된 설경구·전도연 주연의 <생일>에서도 우리 사회의 그런 모습이 드러난다. 유족들이 원하면 보상금을 수령할 수 있게 해놨으니 국가의 책임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버리는, 혹은 그렇게 생각하게끔 하는 우리 사회 일부 정서가 영화 중간중간에 묘사되고 있다.
 
영화 <생일>은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 갔던 수호(윤찬영 분)의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상처를 집중 조명한다. 사고 당시 아빠 정일(설경구 분)은 베트남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산업재해로 인한 분쟁에 휘말려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그래서 어린 딸 예솔(김보민 분)을 지키며 수호를 '기다리는' 몫을 엄마 순남(전도연 분)이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순남은 정일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사고 몇 년 뒤 어느날 밤중에 초인종 소리와 함께 정일의 얼굴이 인터폰 화면에 불쑥 나타나지만, 그날밤 순남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여행용 가방과 선물꾸러미를 든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으므로 밤중에 귀국해 집을 찾아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데도, 순남은 손가락을 초인종에 끝끝내 갖다 대지 않는다. 어린 딸에게도 조용히 하라고 말한다.
 
 <생일> 속 순남(전도연)은 깊은 슬픔을 꾹꾹 안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생일> 속 순남(전도연)은 깊은 슬픔을 꾹꾹 안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 NEW

 
<생일>은 그런 순남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정일이 벌이는 애타는 노력을 조명한다. 한편, 수호네 세 식구를 마음으로 품기 위해 주변의 세월호 유족들이 벌이는 간절한 노력도 함께 보여준다.
 
그러나 정일의 노력도, 이웃들의 노력도, 험난하기만 하다. 순남이 너무나 냉랭하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에게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에 대해 불신의 시선을 보낸다.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한다. 동일한 아픔을 공유한 세월호 유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유족들을 보고 "소풍 오셨나?"며 쌀쌀맞게 대하기까지 한다.
 
그런 순남을 끌어안기 위한 정일의 노력, 그런 순남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일까지 끌어안기 위한 노력들이 <생일>의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제목이 <생일>인 것은 수호의 생일에 수호 가족과 세월호 유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그런 노력에 대한 수호네의 반응이 영화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깊은 아픔과 상처  

<생일>에 묘사된 것 이상으로 세월호 유족들이 정신적 아픔을 겪고 있다는 점은 학계 연구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나마 드러나고 있다. 유족들의 아픔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연구결과들은 우리가 자칫 부주의하기 쉬웠던 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4·16기억저장소가 편찬한 <4·16 구술 증언록: 유가족 편>에 수록된 유족들의 구술 자료를 토대로 하는 이현정·이예성의 논문 '자녀를 잃은 부모의 젠더에 따른 상실감 차이에 관한 연구: 세월호 유가족의 경우'는 유족들의 일반적 정서를 이렇게 설명한다.
 
"부모들은 시시때때로 갑자기, 잃어버린 자녀에 대해 몸서리치는 그리움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살아 있는 동안에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 심지어 죄책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국가족학회가 2018년 발행한 <가족과 문화> 제30집 제3호.
 
자녀에 대한 그리움이 표현되는 구체적 양상에 관해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부모들은 한때 자녀와 좋았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혹은 자녀와 함께했던 장소에 가거나 물건을 볼 때마다, 그리움이 한없이 솟구친다고 말하였다. 어머니 15의 경우, 딸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 희생된 딸이 '특별히 예뻤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딸이 너무 예쁘게 생겨서, 심지어 밤에 자는 동안에 남편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머니 15가 갖는 그리움은 어느 날 밤에 꿈에서 딸을 만나는 것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유족들은 그리움에 더해 죄책감이나 미안함도 품고 있다. 위 논문은 "세월호 부모들은 곧 성인이 되어 꿈을 펼쳐나가게 될 자녀를 갑자기 잃어버리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서 "자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부모들은 자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후회하였다"고 설명한다.
 
<생일> 속의 아빠 정일도 그런 죄책감을 품고 있다. 누명을 쓰고 베트남 감옥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사고 소식을 듣고도 곧바로 올 수 없었지만, 그는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질게 대하는 아내에게 "나를 이해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질책하기만 한다.
 
 <생일>에서 정일은 죄책감으로 인해 섣불리 아내와 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생일>에서 정일은 죄책감으로 인해 섣불리 아내와 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 NEW

  
그런데 유족들의 상처는 엄마냐 아빠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현정·이예성 논문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엄마냐 아빠냐에 따라 정신적 상처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부모가 경험하는 상실감의 내용은 아버지와 어머니 간에 상당한 차이를 드러냈다. 가족을 위한답시고 돈벌이에 몰두한 삶에 대한 후회와, 자녀와 가깝게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거의 모든 아버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감정이었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녀가 어렸을 때 좀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제시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망가진 자녀의 시신을 마지막 순간에 기꺼이 반기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나 후회도 상당히 존재했다. 자녀를 잃고 나서 어머니들은 그동안 참고 있던 남편을 비롯한 시가족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나오는 경험을 하였으며, 장기화되는 참사 이후의 투쟁 과정 속에서 우울증이나 신체적인 통증을 겪고 있었다."
  
'자녀의 시신을 마지막 순간에 기꺼이 반기지 못했다'는 것은, 팽목항에서 자녀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확인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들의 정서에서는 상당 수준의 사회적 소외감도 나타난다. TV 화면에 수도 없이 나타나는 유족들이 그런 마음을 품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유족들은 사고 이후로 '관계의 상실'로 인해 꽤 깊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국민의 재산뿐 아닌 마음도 바라봐야

안산온마음센터의 협력 하에 단원고 유족 250분을 상대로 진행된 설문조사를 기초로 박기묵이 작성한 논문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부모들의 심리적 외상에 관한 기술적 접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유족들은 대인관계, 직장생활, 거주지, 세상에 대한 가치관, 미래관, 음주·흡연, 일상생활 회복 정도에서 모두 문제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의 대인관계에서는 2/3가 넘는 가족(73%)이 가족과 세월호 유족 모임 외에 친구나 친척, 기타 대인관계를 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유족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아픈데 대인관계를 하면 괜찮은 척을 해야 하고, 공감되지 않은 위로의 말을 들어야 해서 아예 대인관계 자체를 피하고 있었다. 대인관계 문제는 직장생활 문제로 확장돼 나타났는데, 절반이 넘는 유족(67%)이 직장에 복귀하지 않았거나 복귀했더라도 다시 사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족들한테서 세상에 대한 불신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세상을 들썩일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정작 유족들한테 별다른 믿음과 안정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사고 이후 유족들의 인간관계가 훼손됐다는 점도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유족을 위로해도 모자랄 우리 사회는 세월호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문제를 좌파 대 우파, 진보 대 보수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일부 사람들로 인해 세월호 유족들은 본의 아니게 어느 한편의 사람들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부 유족들이 지역 사회나 직장, 종교 등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생일> 속의 순남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대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그런 순남에 대해 서운함을 표시하지만, 그건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순남으로 상징되는 유족들을 그런 방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쓸 당시의 조선은, 왕실이 무기력해서 한두 개의 세도가문(권력가문)에 권력과 부가 집중되고 백성 전체의 삶이 피폐해진 나라였다. 이로 인해 물질적 삶뿐 아니라 정신적 삶까지 망가진 조선 사회를 지켜보면서, 정약용은 재난을 당한 백성들이 물질적 곤란 못지않게 정신적 상처로도 힘들어 할 것이라는 점을 깊이 우려했다. 그래서 지방 목민관들이 재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마음까지 살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약용의 외침은 2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은 그냥 외침에 불과하다. 가장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할 2014년 당시의 국가권력마저도 세월호 유족들을 품기는커녕 도리어 불신을 사고 말았다. 국가권력을 민주화하는 일뿐 아니라 국가권력을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일에도 우리 사회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생일> 장면

영화 <생일> 장면 ⓒ (주)NEW

 
생일 세월호 정약용 목민심서 세월호 유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