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때 그들> 포스터

영화 <그때 그들> 포스터ⓒ 영화사 진진

  
<그레이트 뷰티> <유스> 두 편의 영화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이 '욕망 3부작'이라 이름붙인 시리즈 마지막 작품으로 다시 영화 팬과 만났다. 이탈리아 전 총리이자 부패한 기업인, 축구 팬들에겐 AC밀란 구단주로 널리 알려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조명한 영화 <그때 그들>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건설업자로 성공한 뒤 지상파와 케이블, 지역방송, 신문사를 손에 넣고 이탈리아 최대 부호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뒤를 봐준 정치인들에 검은 돈을 대길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정계에 입문, 20여 년 동안 무려 네 차례 집권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됐다.

정책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데다 망언과 성추문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지만,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성공한 기업인이자 남성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해온 그의 전략이 먹혀든 덕분이다. 심지어 지중해 전역을 뒤덮은 난민문제로 우경화한 이탈리아에서 그의 재기는 오직 그에게 달렸단 평가가 많다.

<그때 그들>은 인간 베를루스코니를 파헤친 영화다. 소렌티노는 넓은 정원에서 뛰놀던 어린 양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첫 장면부터 작품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집 안에 들어선 양은 거듭 찬바람을 내뿜는 에어컨과 토크쇼가 나오는 TV 사이에서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쓰러져 죽고 마는데, 이는 조금씩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자극적인 대중문화에 기만당하는 이탈리아 시민을 그대로 상징한 것이다.

"다 가진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야망에 찬 사업가 세르조를 연기한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 영화 전반부를 장악하는 세르조는 베를루스코니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옮긴 듯한 인물이다.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야망에 찬 사업가 세르조를 연기한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 영화 전반부를 장악하는 세르조는 베를루스코니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옮긴 듯한 인물이다.ⓒ 영화사 진진

   
야심차게 시작한 영화는 한동안 젊은 사업가 세르조 모라(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 분)의 뒤를 쫓는다. 지방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세르조는 그대로 베를루스코니의 젊은 시절을 따온 듯한 인물이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뇌물과 성상납을 주저하지 않는 그는, 온통 출세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야심가다. 어떻게든 권력자에게 줄을 대 성공하고 말겠다는 세르조의 시도는 그가 잘 아는 분야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여자와 약물이다.

세르조는 매력적인 여자라면 누구든지 끌어들여 성대한 파티를 기획한다. 파티장소는 베를루스코니의 별장에서 마주보이는 곳으로, 총선에서 패배해 은둔하고 있던 전 총리의 눈에 들겠다는 계획이다.

영화는 시작하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가 흐른 뒤에야 베를루스코니(토니 세르빌로 분)를 처음으로 등장시킨다. 중동 여인처럼 차려입고 등장한 그는 아내 베로니카(엘레나 소피아 리치 분)를 웃게 하려 애를 쓰지만, 아내는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여전히 네 개의 방송국과 많은 기업체를 소유한 베를루스코니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자면 어딘지 허한 느낌이 든다. 영화의 배경인 2006년 기준, 막 70대에 접어든 실각한 전 총리는 정치와 사업에 대한 야심까지 모두 잃은 듯 보인다. 영화는 그런 그가 변화해 과거의 열정을 찾고 재기하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시작은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과거 베를루스코니와 오랫동안 함께 사업을 해왔다는 친구는 자신의 투자실패로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며 손해를 배상해주자고 제안한다. 당장은 큰 손실이 있겠지만 투자자의 신뢰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베를루스코니가 모두 한때 세일즈맨이었다며, 과거 열정적이었던 순간을 일깨운다. 얻어야 할 것도, 올라야 할 곳도 많았던 때를 말이다.

"난 인생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죠"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토니 세르빌로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를 연기했다.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토니 세르빌로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를 연기했다.ⓒ 영화사 진진


그날 밤 영화에서 가장 멋스런 장면이 펼쳐진다. 한밤 중 베를루스코니가 거실로 나와 전화번호부를 뒤져서는 한 여성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부동산 회사 직원이라 소개하고는,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아파트를 팔기 시작한다. 밤중에 전화를 받은 여성과 한때 최고의 세일즈맨이었던 남자 사이의 대화가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영화를 보고 몇 달이 지난 관객들조차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이후 부활한 베를루스코니는 거물의 면모를 드러내며 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장관을 겁박하고, 놀라운 수완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등 거침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영화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국민을 기만하고 정치를 망가뜨린 부패정치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욕망을 드러내다 허무에 부딪힌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이 예고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혼란을 피할 길 없다.

영화는 세르조와 만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탐하는 베를루스코니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끝내 얻지 못한다. 입에서 그녀의 할아버지와 같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 즈음부터 영화는 여전한 욕망과 쇠락한 육체가 일으키는 부조화를 표면화한다. 애써 젊은 척 하지만 늙어버린 육체를 감출 수 없는 베를루스코니와 더 어리고 예쁜 여자들에게 밀려나는 왕년의 일류 콜걸 키라(카시아 스무트니아크 분)의 대치는 노골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끝없이 욕망하지만 마침내 좌절하는 이들의 모습을 영화는 가까이 다가서 지켜본다. 베를루스코니가 영화 내내 언급했던 화산을 홀로 터뜨리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무엇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보잘 것 없고 허망하기까지 한 폭발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데, 그건 감독이 해석한 베를루스코니의 내면과 다를 바 없다.

어린양의 죽음을 기억하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영화는 정원에서 놀던 어린 양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동작동된 에어컨 때문에 쓰러져 죽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 <그때 그들> 한 장면. 영화는 정원에서 놀던 어린 양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와 자동작동된 에어컨 때문에 쓰러져 죽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사 진진

  
아쉬운 건 영화가 본래 의도했던 어린양의 죽음이 영화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 밀랍이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를 떠올리게 한다. 베를루스코니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 마침내 그를 이해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어떻게 이탈리아를 망쳤고 망치고 있으며 또 망칠 것인지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그저 그의 욕망과 좌절, 내면의 갈등과 갈망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폐허 속에서 훼손되지 않고 발견되는 예수상을 잡아내는데,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영화 전반과 궤를 달리한다. 손상되지 않은 희망을 끄집어낸 평범한 인간들은 이밖에 어디에서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으므로.

<그때 그들>은 베를루스코니도 무엇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가 베를루스코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를 이해하고 심지어는 애정하는 쪽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전혀 다르게 찍혔어야 마땅하다. 어린 양의 죽음을 막고 온전한 예수상을 구출하는 장면은 베를루스코니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영화에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가 이 모두를 담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본래 204분짜리 영화로 만들어져 이탈리아에선 1·2부로 나뉘어 개봉했지만, 한국을 포함한 나머지 나라에선 145분으로 한 시간 가량 잘린 편집본이 상영됐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르조의 아버지와 베를루스코니를 거부한 여대생,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잘린 부분이 모두 그와 관계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놀라운 건 실제 베를루스코니가 여전히 유력한 인물이란 점이다. 지난 2013년 탈세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올해까지 공직 진출이 제한됐지만, 의석 100석을 보유한 전진이탈리아(FI)의 실질적 수장이다. 심지어 지난해 총선에서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은 뒤 밀라노 법원이 즉각 복권조치를 취해 공직진출까지 자유로워졌다. 올해로 여든 두 살인 베를루스코니는 올해 초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입장까지 밝힌 상태다.

2012년 베를루스코니의 섹스파티를 폭로해 그를 실각시킨 주인공 이마네 파딜은 이달 1일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현지에선 방사성 물질을 통한 암살설도 파다하다. 정말이지 이놈의 세상에는 쉽게 이해해선 안 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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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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