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를 상상해본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화 <미쓰백>(2018)의 지은이네 집에서 태어나겠다고 할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싱글맘인 케이트네 집은? 그리고, <가버나움>(2019)이 쫓아간 베이루트의 자인네 집이라면 선택 받을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분명 사랑으로 가득한 가족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따뜻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 집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다. 분명하다. 그러니, 태어날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아이들이 겪어내는 고난을 버티느라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낼 이유도 없었을 거다.
 
애석하게도, 아이들은 그들이 태어날 가족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거기에 존재하게 된다. 어른들 때문에, 부모의 결정 때문에, 그들의 삶은 그대로 그들의 운명이 된다. 그래서 세상엔 아동학대를 받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가족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정에서 힘들게 살아내야 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가버나움>의 한 장면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가버나움>의 아이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미안했다. 세상은 자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는 어떤 제도 안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 언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자신의 형제자매는 몇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 아마 부모의 어린 시절도 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 따르면) 엄마는 초경이 끝나자마자 결혼했고 큰 아들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데,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던 자인도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대책이 없는 가족임이 분명해 보인다. 

자인의 여동생은 초경이 끝나자마자 닭 다섯 마리에 팔려갔다가 죽어버렸다. 엄마는 여동생을 대신할 선물이라며 자인에게 또 동생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비극이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불행 안에서, 가족은 대를 이어 계속 태어난다. 
 
 구글 지도에서 찾아본 레바논 베이루트.

구글 지도에서 찾아본 레바논 베이루트.ⓒ 구글

   
영화의 무대는 레바논이다. 내전이 끝나지 않는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만 안정적이고 평화로울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이 이렇게나 불안한 현실의 8할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기에 지켜보는 게 쉽지 않다. 유럽 열강은 제국주의 야욕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의 국경을 그들 마음대로 나눠 놓았고, 그때부터 시작된 혼란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 때문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게다가 언제 이 혼란이 끝날지 알 수도 없다.

"나는 그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라바키 감독의 직설적인 시선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은유 따윈 없는 카메라가 혼란스럽게 흔들리며 담아낸 그들의 삶은, 눅눅하고 지저분하다. 아이들은 늘 폭력에 시달리고, 배는 고픈데 마실 수 있는 물도 없다.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태어나고 대를 잇고, 그렇게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힘겨운 삶을 끝낸다.
 
 <가버나움>의 한 장면

<가버나움>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과연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삶을 도울 수 있을까? 가장 힘든 그곳에서도 자신보다 약한 아이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던 자인의 선의를 세상은 지켜줄 수 있을까? 도움은 단순해서는 안 되고, 지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을 보호하는 시스템까지 모두 손을 뻗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희망은 결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20년 가까이 아이들을 돕는 기관에 후원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아이들은 없었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더 이상 내가 낸 얼마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을 물릴 수 없는 이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낸 후원금의 대부분은, 결국 나 자신의 죄책감을 위안하는데 쓰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은 몇몇의 선의만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세상을 이런 비참한 곳으로 만든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향한 자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이유는 삼신할미가 얼른 세상으로 나가라며, 엉덩이를 때렸기 때문이라는 말을 믿은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태어난 동생들의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삼신할미가 점지해주는 것이 생명이며, 관장하는 것이 그 아이들의 삶이라는 이야기도 믿었었다. 이젠 더 이상 삼신할미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오늘은 제발 아이들의 삶을 보살피는 신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간절히 빌고 싶다. 세상의 수많은 자인과 요나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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