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스틸 컷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스틸 컷ⓒ 하준사


어릴 때 친구를 성인이 돼서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냥 기억 속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으면 좋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릴 때보다 훨씬 멋있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후자인 경우, 이성이냐 동성이냐에 상관없이 '심쿵'한다. 얼마 전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심쿵'했다. 16년 전, 반했던 한 남자를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는 작동이 안 되는 줄 알았던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사람은 일본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에 개봉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인공 '준세이'로 유명한 배우다.

나를 흠뻑 빠져들게 했던 그때 그 준세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사랑에 상처를 입고 피렌체에 가서 유화 복원사로 일하던 준세이가 다시 찾아온 사랑을 외면하려다 막판에 다시 사랑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크게 눈에 띄진 않는 멜로 영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랑 이야기도 배경이 유럽의 피렌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없던 낭만, 로맨스도 생길 만한 곳 아닌가. 게다가 순전히 내 안목의 기준에서 볼 때 영화 속 준세이는 내가 봤던 모든 남자 주인공 중에 제일 핸섬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멋있었다.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의 내면을 잘 담아낸 연기도 훌륭했고,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그의 저음 목소리는 잠 잘 때마다 틀어놓고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피렌체 배경과 애를 태우는 러브 라인, 멜로물에 최적화된 남녀 주인공. 낭만적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막 서른을 넘긴 여성에게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스틸 컷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스틸 컷ⓒ 하준사

 
영화와 남자 주인공에 홀딱 빠져버린 나는 그 영화를 5번이나 보고, OST CD를 질리도록 들었다. 그리고 2011년과 2016년도에 재개봉을 했을 때에는 개봉 첫날 아침 댓바람부터 혼자 영화관에 달려가곤 했다. 볼 때마다 혹시 다시 보면 실망하거나 시들해지는 것 아닌가 해서 걱정했는데 천만의 말씀. 영화 속 준세이는 마치 어릴 적 첫사랑처럼, 어김없이 나를 2003년도로 데려다 주었다. 영화를 볼 때마다 특정한 한 시점으로 소환되어 딱 그때의 느낌을 두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건 얼마나 내밀한 즐거움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작년 말이었다. 친한 후배가 너무 재밌게 본 일본 드라마라면서 건네주었다. 큰 기대 없이 봤는데 최저임금과 여성의 가사 노동 같은 사회 문제와 이슈를 드라마에 잘 녹여낸 수작이었다. 후배와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드라마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리메이크한 <마더>, <최고의 이혼>처럼 사회문화적으로 생각해볼만한 화두를 던지는 드라마가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미가 생겨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상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의붓 엄마와 딸의 블루스>. 와. 진짜 촌스러운 제목이다 하고 넘기려는데, 시청자들의 평점이 좋았다. 일단 1회를 보고 결정해야겠다 싶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순간, 내 동공이 커지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세상에! 나의 준세이(다케노우치 유타카)가 화면에 떡 하니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만난 준세이... 그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맞닥뜨린 준세이는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만 봤던 터라, 16년을 훌쩍 뛰어넘은 그의 모습을 보고 몇 초간은 얼음이 되었다. 당연하다. 불로초를 먹지 않은 이상 이제 그도 중년인데. 어릴 때의 풋풋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중년의 아저씨가 된 준세이. 그런데 어쩌면 좋은가. 그는 주름마저 멋있는 꽃중년이었다.
 
어릴 때 헤어진 남자친구를 어른이 되어서 만난 느낌. 딱 그랬다. 나 혼자 반가워서 "어머~어머~웬일이니"를 연발하며 자석에 이끌리듯 TV 가까이 다가갔다. 젊을 때는 유약하고 예민해 보이는 이미지였다면, 중년의 그는 여유롭고 원숙해 보였다. 연기도 노련했거니와 적당한 능글거림과 젠틀함 사이를 세련되게 넘나들었다.

극중 역할도 좋았다. 금속회사에서 일하는 미야모토 료이치를 연기했는데,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일상 속의 작은 기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병으로 쓰러져 중도에 세상을 떠나지만 아내와 딸을 죽는 순간까지 배려하는 등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캐릭터였다.
 
밤 9시부터 시작된 정주행. 중간에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도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재미있었거니와 완숙해진 그의 연기를 보는 게 즐거워서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방에 들어왔다. 뭔가에 홀린 듯한 밤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홀린 것같이 쏠리는 게, 반하는 거라고 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난 중년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난 준세이에게 두 번째 반한 게 틀림없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 평소 내가 안 하던 짓을 미쳐서 하게 만드는 게 덕질의 기본. 이튿날부터 그에 관한 기사와 그가 나온 드라마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난 재방송도 잘 안 볼 뿐더러, 영화나 드라마를 유료 결제하고 본 적이 거의 없다. TV의 경우 본방사수를 하거나, 꼭 챙겨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놓쳤을 경우에만 재방송을 볼 뿐이었고,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불붙은 덕질 덕분에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가입도 하고, 월정액에 가입했다.

매력적이고 능글맞은 이혼한 변호사로 나오는 <굿 파트너 무적의 변호사>에서부터 기억을 잃은 아내를 돌보는 순정파 남편 역할로 분한 <한 번 더 너에게 프러포즈>, 형사부 참사관으로 열연한 심리 수사극 <보스> 시리즈까지. 그가 나온 드라마를 샅샅이 뒤져서 보고 있는 중이다. 검색해 보니, 그는 배우 최지우, 신현준과 함께 <윤무곡>이라는 드라마를 찍기도 했건만, 나는 왜 그동안 찾아볼 생각을 못했던 걸까. 덕분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걸 몸소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가 톰 크루즈나 현빈 같은 누구나 다 아는 스타가 아니다 보니 함께 열광할 사람이 없다는 점. 그래서 좀 고독하지만, 나만 알고 싶은 스타인 걸로 위로한다.
 
화장대 옆에 그의 사진을 붙인 이유  
 일본 TBS 드라마 <의붓 엄마와 딸의 블루스>의 한 장면.

일본 TBS 드라마 <의붓 엄마와 딸의 블루스>의 한 장면.ⓒ 일본 TBS

  
이번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그의 나이가 내 또래다. 그를 이번 생애에서 실제로 만날 일은 전혀 없을 텐데, 멋있게 나이든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나도 이렇게 퍼져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의 다이어트 성공을 위해 그의 사진을 칼라로 프린트했다. 10대 때 친구들이 장국영이나 주윤발, 레이프 가렛 사진을 코팅해 다닐 때에도 귀찮아서 그런 짓은 전혀 안 하던 내가 그의 사진을 화장대 옆에 붙여 놓았다.
 
대학교 때 부전공을 했다가 졸업 이후로 손을 놓았던 일본어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각 잡고 공부하는 건 아니다. 우리 집에 아직까지 있었나 싶게 쑤셔 박혀 있던 일어 사전을 찾아내서, 드라마를 보다가 궁금해 죽겠는 표현이 나오면 찾아보고 메모를 해두는 정도다. 자막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만, 그가 하는 대사를 직통으로 알아듣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애정이 가서 그런지 일본어가 눈과 귀에 쏙쏙 들어온다. 불과 얼마 전까지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던 머리는 누구의 머리였는지 모르겠다. 애정은 기억 세포까지 재생시키는 모양이다.
 
한류 열풍을 타고 외국 사람들의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무심하게 들었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이야. 동기야 어찌되었건 대학생 때 꽤나 열심히 공부했던 일본어를 다시 시작한 지금, 공부로 할 때에는 전혀 맛보지 못한 재미가 있다. 신세계 발견이다.
 
매일 밤 10시.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시간은 나만의 힐링 타임이다. 돈 들고, 시간 뺐기고, 잠 못 자고, 그렇다고 나한테 돈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 활력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가 멈추어 버렸던 것들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는 이제 더 이상 나를 2003년으로 데려다 주진 않는다. 대신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는 2019년의 '지금'을 생기 있게 살게 해 주고 있다. 그다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이 무덤덤해진 낡아버린 마음에 찾아온 작은 기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와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복원해 준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 다시 나 혼자만의 다케노우치 유타카 신드롬이 시작된 지금,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각한다. 바라보면 반짝하고 빛나는 별 하나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건, 사소하게 행복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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