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남자.’

‘왕이 된 남자.’ⓒ tvN

  
tvN 월화 드라마 <왕이 된 남자> 속의 가짜 왕은 이따금 직각(直覺)적인 인식 방식을 보인다. 광대 출신인 하선(여진구 분)은 '저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뿐, '저것이 누구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고려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맹자> 공손추(公孫丑) 편에서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으려 해서도 아니고, 지역민과 친구들로부터 명성을 얻으려 해서도 아니며, 악명을 얻을까 두려워해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고자 순간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측은지심이 직각적으로 생기기 때문이지, 그 짧은 찰나에 손익과 유불리를 계산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드라마 속의 하선은 국정을 처리할 때도 그런 직각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광해군 시대의 유명한 경제개혁으로 역사서에 두고두고 거론되는 대동법을 논할 때도 그랬다.
 
대동법은 현물 공납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현물 대신 쌀을 납부케 하는 제도였다. 값비싼 특산물이나 타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납부해야 할 경우에 백성들이 겪게 되는 고초를 배려한 제도였다. 지난 21일 방영된 <왕이 된 남자> 제5회에서 하선은 공납의 폐단을 소재로 호조판서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하선: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쌀로 받으면 좋을 것을! 참!
호판: (잠시 침묵한 뒤) 전하, 대동법을 다시 시행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하선: 그렇소!
  
현물 공납의 맹점 이용해 이익 얻은 방납업자들

기차가 보편화되기 전까지,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군(郡) 단위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유랑민이 되거나 상인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관료가 되어 먼 지방으로 떠나는 경우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거주하는 군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군을 벗어나는 것은 현대인들의 해외여행 못지않게 부담스런 일이었다.
 
그런 시대 사람들에게 타 지역에 가서라도 현물을 구입해 공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일이었다. 현물 공납의 이런 맹점을 이용해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 방납업자들이다. 이들은 비싼 수수료를 받고 공납을 대행했다. 권력자들과 결탁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문제점을 시정하고자, 광해군이 즉위 3개월 뒤인 음력으로 광해군 즉위년 5월 7일(양력 1608년 6월 18일) 대동법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때는 경기도에 한해 시범 실시했다. 이 날짜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대동법 실시를 촉구한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지금 별도의 관청을 설치해 매년 봄·가을 백성들로부터 쌀을 징수하되, 1결당 8말씩 거둬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 시세를 고려해 가격을 정한 뒤 그 쌀을 방납인에게 주어 수시로 (현물을) 사들이게 함으로써 간사한 농간으로 물가를 올리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백성들이 공물 대신 쌀을 내면 정부에서 그 쌀로 특산물을 구입하자는 건의였다. 이 건의에 따라 대동법을 실시한 결과로 백성들의 공납 부담이 줄게 됐다. 또 토지 1결당 8말씩 거두도록 함으로써, 토지가 없거나 영세한 농민보다는 부유한 지주가 조세를 더 많이 내도록 만드는 소득 재분배 효과도 거두게 됐다.
 
농민층과 영세한 선비들의 환영을 받은 대동법
 
 선혜청의 위치.

선혜청의 위치.ⓒ 김종성

  
이 개혁에 대해 영세 농민층과 영세한 선비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반면, 지주층과 방납업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대통령 지지율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오면 '잘못하는 편이다'나 '매우 잘못하고 있다'를 눌렀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 경제가 말이 아니다"라는 소문도 유포했을 것이다.
 
<왕이 된 남자> 속의 가짜 왕 하선은 대동법에 대해 직각적 반응을 보였다. 좋으니까 그냥 하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제의 광해군은 그렇지 못했다. 대동법이란 경제개혁을 최초 실시해 놓고도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개혁에 대한 찬반 양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가안전보장회의 격인 비변사에서 아래와 같은 건의를 내놓았다. 광해군 2년 9월 14일자(1610년 10월 30일자) <광해군일기>에 실린 내용이다.
 
"경기도에 시행해본 결과 경기도 백성들이 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모든 도(道)에 두루 시행해 만백성이 균등하게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게 참으로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대동법 시범 실시 2년 반의 경험을 토대로 나온 건의였다. 경기도 백성들이 좋아하고 있으니 전국 각도에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광해군 2년 11월 18일자(1611년 1월 1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대동법의 시행 지역을 수정하자는 건의에 대한 광해군의 반응은 이랬다.
 
"선혜청 제도(대동법)는 오래도록 시행할 만한 것인가? 일일이 수정한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을 내게 하는 일을 영원히 시행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 해는 음력 11월 8일이 양력 1월 1일이었다. 양력을 기준으로 할 때, 이 시점은 1608년에 등극한 광해군이 집권 4년차로 접어드는 때였다. 이 시점의 광해군은 대동법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영원히 시행할 수는 없을 듯하다'는 말에서 대동법 실시를 힘들어하는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점의 영의정인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한음)이 광해군을 말리지 않았다면, 대동법이 이때 허무하게 폐지됐을 수도 있다.
 
4일 뒤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이 강원도만큼이라도 확대 실시하자고 건의했지만, 이 역시 거부됐다. 거부한 주체는 이번에도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지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방납업자들과 유착한 북인당(여당) 인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두환 국민대 교수의 논문 '선조·광해군대 대동법 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광해군 즉위년 4월(음력) 방납배와 결탁하여 방납을 일삼는다고 비난을 받던 기자헌이 유영경 대신 좌의정이 되는 등, 정권을 주도하는 북인 세력이 방납을 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과 연결된 척신(친척관계인 신하) 세력과 궁중과 연결된 방납인들이 방해를 하여, 대동법이 경기도에 시행된 지 1년도 안 되어 혁파 여부가 논의되어, 영의정 이원익은 혁파를 반대하고 판중추부사 윤승훈과 우의정 심희수는 혁파를 찬성하지만, 대간(사헌부)의 계사(啓辭, 임금에게 제출하는 글)에 따라 가을까지 1년간 시행해 보는 선에서 우선 무마시킬 정도였다."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1997년 발행한 <한국학 논총> 제19권에 수록.
 
광해군이 확대 시행하자는 건의를 받고도 주저했던 것은 여당 내 반대론자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세 농민층과 영세 선비들의 지지를 받고도 전국 실시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다.
 
광해군 정권을 약화시킨 요인 중 하나

대동법은 광해군이 폐위된 뒤 점차적으로 확대 실시됐다. 인조 때인 1624년에는 강원도로 확대되고, 효종 때인 1651년에는 충청·전라도로 확대되고, 숙종 때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최초 시행자인 광해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적극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논문 '광해군대 경제정책에 대한 교과서 서술- 대동법과 양전을 중심으로'에 이런 평가가 실려 있다.
 
"왕실과 권력자들인 방납세력의 방해가 시작되었고, 광해군 역시 현물 수납의 기존 공납제로 회귀하기를 원하였다. 결국 광해군대 내내 선혜청과 경기 대동법은 유명무실한 상태에 빠졌다."
-조선시대사학회가 2017년 발행한 <조선시대사학보> 제83호에 수록.
 
<왕이 된 남자> 속의 하선처럼 경제개혁에 대해 직각적 찬성을 표시하면 '시야가 좁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세상사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개혁을 놓고 이해관계와 유불리를 지나치게 따지면 끝까지 완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처럼 경제위기로 내몰리는 대중을 구하려고 달려가는 그 사이에 손익과 유불리를 지나치게 계산한다면, 경제개혁에 집중하지 못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광해군은 중립외교·실리외교로 전쟁을 방지했다. 외교·안보에서는 업적이 컸다. 하지만 경제개혁은 그렇지 못했다.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라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대동법 시행 이후로 15년을 더 집권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것이 광해군에 대한 서민층의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됐다.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가두고 궁궐 공사를 많이 벌인 것도 민심이반을 초래했지만, 경제개혁을 시작해 놓고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이 됐다.
 
경제개혁을 시작하면 기득권층이 반발한다. 그것을 완성하지 못하면 일반 대중이 반발한다. 그러니까 경제개혁을 시작해 놓고 완성하지 못하면, 기득권층과 대중의 지지를 모두 잃게 된다. 드라마 속 하선에 비해 생각이 너무 많은 실제의 광해군은 그런 우를 범했다. 그것이 광해군 정권을 약화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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