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KBS1에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사예능 <거리의 만찬>을 방영했다. 이 방송이 여느 시사예능과 달랐던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MC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했다는 것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 파일럿 1편에서는 방송인 박미선, 정치학 박사 김지윤, 국회의원 이정미 세 명의 여성이 당시 파업 중이던 KTX 해고 승무원들을 만났고, 2편에서는 강원도 고성을 방문해 실향민과 최북단 명파리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놀랍게도 <거리의 만찬>은 이 두 가지 지점만으로 시사예능 판에서 독보적인 차별성을 확보했다. 바꿔 말하면 그 동안의 시사예능이 대체로 스튜디오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 스튜디오 안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었던 사람도 거의 '남성'이었다는 의미다. 그렇게 새로운 형태의 시사예능을 표방한 <거리의 만찬>은 '구성'과 '방식'만으로 기존의 틀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내면서 지난 11월 17일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거리의 만찬>의 MC. 왼쪽부터 방송인 김소영, 정치학 박사 김지윤, 방송인 박미선

<거리의 만찬>의 MC. 왼쪽부터 방송인 김소영, 정치학 박사 김지윤, 방송인 박미선ⓒ KBS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시사 예능

사실 <거리의 만찬>에서 다루는 이슈들은 그 자체로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지난 1회 '아주 보통의 학교' 편에서는 강서구의 특수학교 건립 문제를, 2회 '천 개의 낙태' 편에서는 낙태죄 문제를 소재로 했다. 사회적으로도 논쟁이 많았고 그만큼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가 됐던 사안들이다. 그렇다고 시사다큐 프로그램처럼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거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이슈들이 당사자의 입에서 '살아있는' 이야기로 나올 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고 충분히 많이 얘기됐다고 생각했던 이슈들을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애아를 둔 엄마들의 지난했던 투쟁 역사를 듣고 있노라면 엄마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겹겹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는 '낙태죄' 이슈를 뉴스로 접할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이렇게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비로소 이슈 속에 가려져 있던 '사람'을 발견해내고 잠깐이나마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거리의 만찬> 1회 중

<거리의 만찬> 1회 중ⓒ KBS

 
또, <거리의 만찬>은 다소 무겁고 진중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접근하면서도 '예능'이 주는 소소한 재미와 편안한 분위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진행과 편집 방식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일단 '거리의 만찬'이라는 제목답게 이슈의 주인공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정성스런 음식 한 끼를 곁들이는 콘셉트를 선보였다. 한 회에만 무려 30곡이 넘게 나오는 다양한 배경음악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시나 다른 인용문들도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드는 데 한 몫 하는 장치들이다.
 
여성 MC 세 명의 역할과 조화도 돋보인다. 이들은 오랫동안 '중년 남성'이 주로 차지하고 있던 시사 영역에서 자신만의 능력을 입증해 보인다. 메인 MC인 방송인 박미선은 오랜 방송경력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힘이 있고, 정치학 박사 김지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야기가 더 풍부해질 수 있도록 살을 보탠다. 정규 프로그램이 되면서 이정미 국회의원을 대신해 새로 합류한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김소영은 시청자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솔직하게 소통하는 점이 매력이다.
 
개인의 경험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균형
 
 <거리의 만찬> 2회 중

<거리의 만찬> 2회 중ⓒ KBS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냐만 <거리의 만찬>의 한계 또한 가능성만큼이나 선명하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건 무척 중요하지만, 제작진의 역할은 이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회적 의미와 제대로 연결해내지 못한다면 자칫 한 개인의 경험으로 그치거나 감정적인 호소로만 비칠 위험이 있다.
 
그런 지점에서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방송이 지난 2회 '천 개의 낙태' 편이었다. 방송은 산부인과 전문의들과의 대화를 통해 의학적인 관점에서 낙태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로부터 여성이 어떤 상황에서 임신중단을 결정하고 실행에 이르게 되는지를 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에게 이 경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강조할수록 여성들에게 임신중단의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는 사라지고 '불쌍한 여성'만이 남는다.
 
물론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방향이 있고, 50분 남짓의 방송시간을 고려하면 시간적인 제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데다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다룰 수 있는 범위에도 제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현실적인 조건들을 이해하더라도 앞으로 좀 더 세심한 고민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거리의 만찬>이 내세우는 강점은 언제든 치명적인 약점으로 뒤바뀔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 막 첫걸음을 뗀 프로그램이기에, 이 파일럿 방송을 정규 편성으로 만들어 내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용기 있게 담아낸 제작진들에게 따스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금요일 밤 10시라는 프라임 시간대에 기록한 시청률 5.2%는 프로그램의 사회적 의미를 떠나 사실 시청자들도 이런 방송을 기다려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들에게 말 걸고 위로를 전하는 <거리의 만찬>만의 방식은 거창하진 않지만 특별하다. 말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따스한 밥 한 끼를 함께 나누는 일이 설령 거대한 구조를 바꿔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벽을 조금씩 무너뜨려 가리란 믿음이 있다. 이들의 만남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이유도 그래서다. 세상에는 아직 충분히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콘텐츠 리뷰 미디어 <치키>에도 실렸습니다(http://cheeky.co.kr/2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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