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한 한 여성이 끝내 전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얼마 전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뉴스를 접한 후 꽤 오랫동안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질 수 있는지 화가 났고,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한 한 여성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런 가운데 꽤 오래된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바로 2004년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 끔찍한 폭력사건을 맞닥뜨리면서 왜 하필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이 영화가 자꾸만 떠오르는 걸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14년 전 보았던 영화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영화 속에 흐르는 분위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의 원인이 됨을 말이다.
 
이상적이어서 폭력적인 마을 스텝포드
 
잘나가던 방송인 조안나(니콜 키드먼)는 프로그램의 지나친 선정성이 문제가 되면서 방송계에서 퇴출당한다. 슬픔에 빠진 조안나는 두 아이 및 남편 월터(매튜 브로데릭)와 함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하고 코네티컷의 한 마을 스텝포드로 이사한다.
 
너무나 평화로우며 잘 정돈된 스텝포드. 멋진 집들과 아름답고 친절한 이웃이 있는 곳.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이 마을의 모든 여성들은 늘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으며 항상 미소 짓는다. 운동할 때조차 원피스와 힐 차림인 여성들을 보고 조안나가 "저런 옷을 입고 운동을 하냐"고 묻자, 이 마을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여성리더 클레어(글렌 클로즈)는 "우린 뭘 하든 최상으로 보이려고 해요. 상상해 봐요. 남편들이 어두운 스웨터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와이프를 본다고 말이에요"라고 답한다. 이 완벽해 보이는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남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며, 철저하게 대상화된 채 살고 있었다. 이에 조안나는 "이 여자들은 모두 나를 미치게 할 것 같다"며 한탄한다.
 
 스텝포드의 아내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게 미소짓는다.

스텝포드의 아내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게 미소짓는다.ⓒ 드림웍스

 
반면,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산다. 여성들이 가정을 돌보는 사이 남편들은 '남성협회'에서 게임과 오락을 즐기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들의 대화 속에는 여성, 즉 자신의 와이프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시선이 다분하다. 그들은 와이프를 얼마나 자신 마음대로 조정하는지를 과시하며 여흥을 즐긴다. 흔히 말하는 폭력적인 장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이때부터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알았다. 끔찍한 가정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를 말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스텝포드에 오기 전 모두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자신만의 삶을 사는 여성들이었다. 이런 여성들의 뇌에 센서를 심어 오직 남성에게 순종하는 아내로 만들어버린 영화 속 남성들. 사회적 성취를 중요하게 여겨온 여성들에게 이 같은 삶은 '죽음'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하는 이 영화 속 남성들의 태도는 아내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고, 급기야 목숨까지 앗아간 살인범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서운 가부장 문화의 흡인력
 
더 소름끼치는 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부장적 폭력이 엄청난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스텝포드에 오기 전 월터는 해고당한 조안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신경쇠약에 걸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따뜻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월터가 변한다.

남성협회에 다녀온 뒤 월터는 이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이 마을은 그 어느 곳보다 멋진 곳"이라며 "그 어두운 분위기의 옷부터 바꿔 입으라"며 아내를 개조하려 든다. 해고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난 조안나는 갑작스레 바뀐 남편의 태도에 겁을 먹고는 스텝포드의 아내들처럼 옷을 차려입고 자신을 바꿔보겠다고 다짐한다. 조안나의 친구이자 작가인 바바라(베트 미들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조안나는 "지난 밤 남편이 달라졌어요. 강압적이고 고압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가부장적 폭력은 그토록 당당하고 힘 있는 여성이었던 조안나마저 주눅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도시에서 전통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해갈 수 있었을까. 이는 오래된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히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월터는 아무런 불편 없이 스텝포드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심지어 "이 곳은 마치 삶의 이상향 같다"고까지 말한다. 남성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가부장문화를 흡수하는 것은 월터에겐 전혀 어색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일일 테다. 하지만, 조안나에게 이런 변화는 주체적인 나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조안나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조안나는 변해보려고 노력한다. 밝은 옷을 입고, 집안 곳곳을 꼼꼼히 단장하며, 예쁘게 컵케이크를 구우면서 말이다. 도대체 그녀는 왜 자신답지 않음을 알면서도 변화해보려 노력한 걸까. 이는 가부장 사회의 획일적 분위기가 조안나를 압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따르며 이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곳에서 조안나는 스스로가 '비정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방송인으로서 겪은 자신의 불행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수 천 년 간 누적되어온 가부장적 집단무의식은 월터와 조안나가 변해가듯, 우리 삶에서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끔찍한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사건들, 친밀한 남녀관계에서의 폭력을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그 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는 시선들이 그 증거이다.
 
 조안나는 스텝포드에서 스텝포드의 와이프들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조안나는 스텝포드에서 스텝포드의 와이프들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드림웍스

 
충격적인 반전 속 숨겨진 진실
 
다행히, 월터는 '진심'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안나를 개조하려고 계획을 세운 그 날 월터는 자신이 원하는 건 마음 없는 수동적인 기계가 아님을 깨닫고 조안나와 함께 이 마을의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말 경악스러운 사실이 밝혀진다. 이 마을을 진두지휘해왔던 남성협회장 마이크(크리스토퍼 월켄)가 실제로는 로봇이었고, 이를 조종해온 것이 그의 아내 클레어였다니!
 
너무나 갑작스런 이 반전은 어처구니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나는 이 반전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과학자였던 클레어는 일에 지쳐 귀가한 어느 날 실제 남편이었던 마이크의 외도를 목격한다. 남편과 그의 애인을 죽인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다 "여성들이 스스로 기계였던 그 때"를 이상향으로 생각하며 스텝포드 마을을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로봇 남편 마이크는 남성들을 따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해낸 것이었다.
 
클레어는 남편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물론, 자신이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따르지 않은 것이 남편의 외도를 불러왔다는 죄책감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성공이 이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를 되돌릴 길은 가부장문화를 따르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클레어가 자신의 성공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억지스럽다.
 
문제는 이런 억지스런 상황이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가 식사준비를 해 놓고 퇴근한 남편을 맞이하는 것을 이상적인 가정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미디어, 성공한 여성은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의 역할에도 완벽해야 한다는 통념, 여전히 굳건히 신봉되고 있는 모성 신화, 아이의 성취와 어머니의 헌신을 동일시하는 분위기. 이런 것들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부장문화 속 전통적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끔 만든다. 이런 죄책감은 사회적 성취를 원하는 여성들의 자아를 분열시킨다. 또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정서적 언어적 폭력에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영화 속 클레어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여성 스스로가 기계였던' 시기로 회귀하고, 조안나가 전통적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 자신을 개조하려 했듯이 말이다.
 
 성공한 방송인 조안나는 자신만만한 여성이었다.

성공한 방송인 조안나는 자신만만한 여성이었다.ⓒ 드림웍스

 
성평등이 당연한 듯 여겨지는 요즘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14년 전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가 보여준 '가부장 사회의 이상향'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시선, 여성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분위기는 그 자체가 정서적 폭력일뿐더러, 끊이지 않는 신체적 폭력의 원인이 된다.
 
영화 속에서 폭력을 끊어낸 것은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스텝포드가 문제임을 깨달은 조안나의 통찰력, 그리고 조안나를 소유하는 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님을 인정한 월터의 용기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여성들이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이 내 잘못이 아닌 사회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남성들이 아내를 소유하려는 자신의 무의식적 말과 행동을 점검하고 바꿔나가려 노력할 때, 가정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간단하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런 노력들을 이어갈 때, 스텝포드의 로봇 시스템이 파괴됐듯, 우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 가부장적 폭력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덧) 영화의 '통쾌한' 결말을 보고도 계속해서 기분이 찜찜했다. 곱씹어보니 영화 전반에 흐르는 여성성 폄하가 영 불편했던 것 같다. 영화 속 남성협회 소속 남자들은 여성적인 남성 동성애자를 남성적인 동성애자로 바꾸려하고, 아내들을 개조하기 전 성공한 아내 밑에서 '여자처럼 살아왔다'며 한탄한다. 스텝포드의 남자들이 아내들의 지시를 받아 쇼핑을 하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가부장사회를 비난하면서도, 여성성을 폄하하는 이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 자체가 무척이나 폭력적이었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이중구속을 고발하려는 의도였다면 또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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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로 세상을 관찰하며 살다,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며, '생명감수성'과 '마음의 성장'을 일상과 문화콘텐츠를 통해 공유하고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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