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난한 배우라고,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훤칠한 키와 점잖은 얼굴에서 선과 악이 모두 읽히는, 배우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언제나 작품을 살리는 연기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어중간한, 김주혁은 내게 그런 배우였다. 

그의 연기를 처음 본 것은 2003년 개봉한 <싱글즈>에서였다. 김주혁은 젠틀한 외모에 능력, 성격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벙한 구석이 있는 수헌을 마치 맞춤옷을 입은 듯 능청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중들에게 각인 시켰지만, 2003년에 기억해야할 영화와 배우들은 그 말고도 많았다(2003년은 코미디, 공포, 사극 할 것 없이 다양한 장르의 한국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던 해로 한국영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때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도 이 해에 개봉했다).
 
 <광식이 동생 광태> 영화 포스터

<광식이 동생 광태> 영화 포스터ⓒ MK픽쳐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괜찮았다. 신인에 다름없었던 그는 단숨에 충무로의 기대주로 부상했고 2005년에만 그가 출연한 작품 세 편(TV 드라마 포함)이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이때 개봉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광식이 동생 광태>인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킬킬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웃음의 7할은 김주혁 때문이었다. 유쾌하게 시작해서 뻔하고 허무한 결말로 맺어지기 일쑤인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광식이 동생 광태>의 시나리오는 탄탄했고 당시의 젊은 감성과 감각을 잘 반영한 탓에 그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십 수 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는 당시의 남녀관계, 즉 연애관과 지금의 것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스러워 예전만큼 웃지는 못했다. 하지만 멀쩡하게 생겼음에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말도 못 걸고, 눈뜨고 코 베이는, 아니 자신이 제 코를 잘라서 바치는 광식을 연기한 김주혁의 힘을 뺀 연기가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실 코믹 연기를 하는 배우들 중에도 미남 배우들이 꽤 있지만 김주혁이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보여주었던, 힘을 뺀 엉뚱함이 재밌기는 쉽지가 않기 때문에 그의 연기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방자전>에서 인상 깊은 연기 보여준 배우 김주혁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영화 <방자전>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아무튼 <광식이 동생 광태>를 보고 '김주혁이 이렇게 재밌었어? 연기 잘 한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몇 년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여자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들이었다. <청연>이 그랬고, <사랑따윈 필요없어>, <아내가 결혼했다>도 그랬다. 2010년 개봉한 <방자전>에서도 춘향을 연기한 조여정이 굉장한 주목을 받았다. 조여정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배우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는데, 그녀 이상으로 김주혁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춘향전을 새롭게 각색한 <방자전>에서 그가 연기한 방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머슴이 아니라 춘향에게 성적 판타지를 주고 그것을 관객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하는 재해석된 캐릭터다.

<방자전>에서 배우 조여정이 이전의 귀엽고 상큼한 모습이 아닌 성숙한 여인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김주혁이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 반대의 모습으로 극의 성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보여준 남성적 매력과 연기는 훌륭했으며 영화는 대 성공이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3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2010년대 들어 한국 영화계에서는 남자 배우들이 전성기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오히려 김주혁은 작품 활동을 쉬게 된다. 2011년 그가 주연을 맡은 세 편의 영화가 연달아 흥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4년간의 연기 공백기를 갖게 된다(이 시간 동안 그는 TV 예능 프로그램인 < 1박 2일 >에 출연했다). 오랜 공백 후 그동안 쉬었던 것에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작품들이 줄지어 개봉했고 이때 개봉한 영화 두 편 때문에 나는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팬이 되었다.
 
2016년 개봉한 김주혁 영화 2편... 그의 팬이 되다
 
 영화 <비밀은 없다>의 한 장면

영화 <비밀은 없다>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보통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광식이 동생 광태>와 <방자전>에서의 김주혁은 의외의 모습이었으나 그의 연기는 다른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처럼 쉽게 잊혔다. 그의 연기가 내 뇌리에 박히게 된 것은 2016년 개봉한 <비밀은 없다>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고나서였는데, 이 두 영화에서는 그의 연기가 새롭다거나 의외라고 볼 것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작품이 요구하는 만큼의 연기를 했고 여느 때와 같이 자연스러웠다. 결국 작품을 보는 취향에 따라 배우의 연기도 다르게 다가오는 건가? 취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감정의 고저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연기를 보여준 손예진(역시 대단한 연기였다)과 밸런스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비밀은 없다>에서 김주혁의 존재감은 역의 비중과 상관없이 대단했다. 그는 단정한 얼굴에 여러 개의 마스크를 겹쳐 쓴 젊은 정치인을 설득력 있게, 깔끔하게 연기했다.

반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깔끔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화가 영수를 연기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나서는 '왜 진작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홍상수 감독 영화 특유의 지질한 남자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영화 <공조>의 한 장면

영화 <공조>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그는 계속해서 작품과 조화를 이루는 좋은 연기를 보여 왔지만 소위 말하는 '한방'이 있는 배우는 아니었다. 성공의 영광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이렇게 말하면 그가 불운했던 배우라도 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재능이 아쉬워서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경미 감독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의 연기 폭을 확장시켜주었고, 2017년 개봉한 <공조>와 그의 유작이 된 <독전>은 조연이라 할지라도 그의 출연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흔히 '물이 올랐다'는 말을 하는데 2017년의 그가 그랬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이었고, 그동안 배우로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내공이 폭발하려는 때였다. 예고 없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다음을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그의 부고를 접했을 때 마치 아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마음이 헛헛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늘(30일)로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적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되짚어보며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성장을 보았고 그가 얼마나 아까운 배우인지 다시금 느꼈다. 아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며 쓰리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겠냐 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영화들은 언제라도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영화 <독전>의 한 장면

영화 <독전>의 한 장면ⓒ (주)NEW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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