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안시성>은 제목 그대로 안시성 전투를 보여준다. 이 안시성 전투는 살수대첩과 더불어 위대한 승리라고 불리는 고구려 시대의 이야기인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대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승리가 워낙 옛날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668년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이다. 말하자면 2018년을 사는 우리에게 고구려는 자그마치 1350년 전의 이야기이며,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대략 50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 안시성 전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가 없다. 단지 한국과 중국에 남은 약간의 사료들을 모아 거대한 윤곽만을 만들어볼 뿐이다. 즉 안시성 전투라는 것이 대승이기는 하나, 어떻게 승리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자세하게 알 수 없는 만큼 대략의 윤곽만이 남아있으며, 그 빈 구멍들은 후대 사람들의 온갖 상상으로 채워지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안시성>에서 그 상상의 결과물을 보고 있다. 이 영화는 흔히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원불명의 안시성주를 다루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잘생기고 활달한 성격으로 나온다. 성주 양만춘 역에는 조인성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이 영화가 안시성 전투를 꽤 진중하게 다루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얼핏 보았을 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그러나 영화는 양만춘이라는 인물을 정치적 야망이나 국가에 대한 신념을 지닌 것이기보다는, 성주라는 직책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성 사람들을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다. 조인성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이 캐스팅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사극에서는 생소한 조인성 배우가 이 영화에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배우에 맞춰진 듯한 느낌도 있다. 쾌활하면서도 어색하고, 약간의 진중함이 곁들여진 듯한 시나리오를 양만춘이라는 인물이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조인성 배우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조인성 배우는 적어도 이 영화에서 의리있는 성주 역할을 잘 해내었다. <클래식>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점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드러난다. 
 
 영화 <안시성>의 작품 포스터

영화 <안시성>의 작품 포스터 ⓒ NEW

  
한층 더 가벼워진 톤 

조인성 배우의 팬에게 잠시 실례되는 발언을 해야겠다. 조인성 배우의 연기는 어색하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시라. 연기를 못한다는 뜻의 어색함은 아니다. 조인성 배우의 어색함은 그를 특정하는 하나의 문구이다. 여기에서 어색함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성격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보조하는 무게 추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활달하고 경쾌한 그의 성격이 너무 앞서 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하중을 실어주는 무게 추 같은 느낌이다. 말하자면 그의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균형지점을 찾아간다. 아마도 조인성 배우의 팬들은 바로 그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일 테다. 물론 잘생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묘함은 곧 어중간함을 뜻하기도 한다. 안시성 전투라는 장엄함에는 기본적으로 진중함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데, 영화는 전반적으로 그만큼 무게 있지가 않다. 제작비가 200억 원이 투입되었다는 이 영화에서 예산은 아무쪼록 전투장면에 거의 투입되었을 것인데, 전투장면은 사람이 죽고 등장인물이 차례로 죽어 나간다는 점에서 절대로 가벼울 수가 없다. 너무 무거워졌으면 무거워졌지, 그것이 가볍게 묘사되는 순간에는 영화와 영화 제작진의 윤리의식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예 진중함을 내려두고 코미디 그 자체로 간다면 모를까,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화에 바탕을 뒀음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이 영화는 확실히 진중했어야만 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진중함을 표방한다. 영화의 전체 시나리오를 보면 그렇다. 그러나 '확실하게' 진중하지는 않다. 오히려 조인성 배우의 이미지를 이용해 영화의 전체적인 동선을 만드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안시성 출신의 어느 젊은 군인을 보여주는데 그는 흔히 말하는 엘리트이다. 무관 학교 출신으로써 장차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이 확실한 이 인물은 연개소문의 명령을 받고 안시성으로 온다. 연개소문은 이 인물에게 안시성 성주만이 자신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면서 그를 배신자로 칭하고, 암살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이 인물은 정작 안시성에서 그의 성품에 반해 생각을 거두게 되고, 안시성 전투에서 함께 싸우는 동료가 된다.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NEW

  
영화가 관객을 반복학습시키는 방법

작품의 주요한 줄거리는 이 젊은 군인 '사물 (남주혁 분)'의 고뇌 그리고 안시성주 양만춘(조인성 분)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양만춘의 모습을 외부에서 온 어떤 인물이 확인하는 방식이므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르다. 연개소문에게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성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개인의 역할'이 주요 테두리라면, 그것을 확인하러 온 사물의 역할은 관객을 대변하는 것이다. 관객은 사물을 따라 안시성에 오고, 연개소문의 말과는 달리 인간적이고 애국적인 그의 면모를 보고는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가 양만춘의 신념이라면 관객은 사물을 통해서 그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반복학습이다.

이 반복학습은 크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인데, 첫째는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것이고, 둘째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동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판단까지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연개소문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 쉽게 말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래서 관객은 연개소문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안시성주에 대해 판단이 갈릴 수도 있다. 연개소문이 내세우는 논리는 자신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진정시켰다는 것인데, 이런 부분은 아무쪼록 우리 역사에서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신(군사)이었다는 점과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맥락에서도 그러하다. 그런데 분명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평가는 관객 개인마다 세세하게 갈릴 것이다. 이처럼 관객은 이 연개소문에 대한, 그리고 그가 내리는 안시성주 살해 명령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그렇다고 연개소문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관객이 그 두 가지 평가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듯이, 명령을 받고 안시성주를 죽이러 가는 사물의 마음 또한 편치가 않다. 사물의 고향이 안시성인 만큼, 안시성을 대변하는 안시성주를 암살한다는 것은 고향을 암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물에게는 안시성주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없고, 단지 연개소문으로부터만 주관적인 판단을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물은 그 살해 행위에 대해 줄곧 고민하게 되고, 안시성주의 행동을 관찰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만약 그가 악인이라면 살해하는 것에 죄책감을 지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물이 관찰해본 바에 따르면 안시성주는 좋은 사람이다. 성 입구부터 꾀죄죄한 차림으로 성주답지 않은 검소함을 보이더니, 성에 침입하려 하는 첩자를 즉석에서 알아보는 현명함도 있다. 또한 성 안에서 만나본 그의 모습은 성 주민들에게 친근한 이웃이자, 상관으로서의 리더십도 있고, 실제 전투에서 이십 만 대 오천 명이라는 기적의 전투를 수행하기까지 한다. 즉 사물이 바라본 안시성주의 모습은 인간적으로나 군인으로서나 완벽에 가까웠고, 그런 모습에 동화되어 가던 사물은 명령을 지키려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다가 그것조차 용서하는 성주의 모습에 완벽하게 넘어가고야 만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설정된 사물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전투 장면이 메인인 이 영화에서 안시성주의 비중이 큰 것은 무척 당연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가 주인공인 것은 안시성주라는 사람의 인품을 확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다면 그저 익명의 누군가로만 남는 것처럼,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인물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설정된다. 영화 안의 주인공이 안시성주라면, 그를 보고 깨우침을 얻는 관객은 영화 밖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때 관객이 얻는 깨달음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중 하나다. 연개소문이 배신자라고 칭한 이 인물은 나라에 거스르는 반역자일까 혹은 신념을 지키는 충신인 걸까. 관객이 연개소문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안시성주에 관한 생각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관객에게는 연개소문이 했던 말을 진실로 확인하는 '재확인 루트'가 있고, 반대로 연개소문의 말이 거짓임을 깨닫는 '재발견 루트'가 있다. 그가 배신자라고 알고 있었던 사실을 '재확인'하거나, 그가 배신자가 아님을 '재발견'하게 된다. 어찌 됐든 이 두 가지 판단의 결론은 안시성주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주관적인 '선택'은 오로지 이 부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영화가 정한 결론은 안시성주, 그의 신념이기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메시지가 일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NEW

  
안시성주는 무엇인가

관객의 주관적인 선택에 관해 말하기 전에 잠깐 안시성주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곧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시성주는 어떤 사람인가. 그 해답은 그가 말하는 대사가 있다. 안시성주가 작중에서 말하는 대사 중 유의미한 것을 가져와 보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의 대군에 놀라는 아군을 보며 "너는 이기는 싸움만 하느냐?", 군인보다는 우리가 희생되는 게 합리적이라는 백성의 말에 "모두 우리 성 주민이다", 왜 연개소문을 배신했느냐는 말에는 "나는 그저 성주로서의 책임을 다할 뿐이다"라고 답한다. 

말하자면 안시성주를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인 맥락과 관계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에 성과 성 주민들이 살아남았다. 어떤 단어로는 꿋꿋한 것이고 어떤 단어로는 갑갑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제자리를 지키는 꿋꿋함이야말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을 말하고 있으니, 아무쪼록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뒷받침하듯 영화는 도끼 부대, 기마대, 땅꿀꾼 등 군사와 일반 백성들을 여러 방면에 걸쳐 보여주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캐릭터성'을 강조한다. 도끼 부대는 도끼를 잘 쓴다거나 땅꿀꾼은 땅을 잘 판다거나 하는 등의 역할이다. 그들은 여러 전투에 걸쳐 자신의 '재능'을 내세우고, 항상 용감하게 싸우며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다르게 말해, 그들은 제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즉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오로지 안시성주라는 특출난 인물 때문만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한 소시민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NEW

  
제 자리를 지키는 꿋꿋함 혹은 묵묵함

이 영화가 안시성주의 모습을 관객에게 확인시키는 식으로 전개되는 걸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영화가 관객에게 하고픈 말은 제 자리를 살아가는 힘일 것이다. 그리고 관객이 안시성주에 대해 판단하기까지의 과정이 두 갈래인 것을 떠올려 볼 때, 관객은 자신의 자리를 재확인하거나 재발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일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무엇이 잘못이었는지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었다면 재발견을 통해 꿋꿋한 소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안시성주는 고구려의 모두가 자신을 배신자라 칭하는 상황에서도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다르게 말해서, 그는 정치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고 눈앞에 몰려오는 적을 자신의 역할대로 묵묵히 해치웠을 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이념적인 대립은 대립이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역할은 해야 한다는 '공과 사의 분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죽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지만 그와 주민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 그들이 위기에서 사심을 드러냈더라면 안시성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NEW

 

가해와 피해를 초월해 존재하는 무언가

그래서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과 결이 좀 다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갈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윤리적인 판단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안시성>에서의 논리는 가해자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가해자들 또한 자신의 위치에서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가해자나 피해자나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애국심이라는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윤리적 판단을 뒤로 미루어 버리는 자질구레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대의명분이라는 게 윤리적인 판단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에서 국군이 자유주의 수호라는 명문으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부분이 이 영화가 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다. 기존의 소시민 영화들이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하고, 그리하여 관객은 주인공을 따라 가해 사실을 깨닫고 불의에 항거하게 되는 '재확인'의 면모가 강조된다. 그러나 <안시성>에는 그 배경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 '양만춘(안시성주)'이 등장함으로써 윤리적인 면은 가려지고, 우리에게는 고뇌만이 남는다. 정확하게는 안시성주를 암살하려는 사물의 모습을 따라서 함께 고뇌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에 몰입하면서 안시성주에 대한 판단을 종잡을 수 없다가, 끝내 사물처럼 안시성주를 '재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묻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 현장에 대해 무지한 인물이 현장 속에서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탐구 플롯이 아니다. 이런 플롯은 <택시 운전사>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었고, 광주에 무지했던 택시 운전사 만섭은 광주 속에서 진실을 깨닫는 것이었었다. 그렇지만 <안시성>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논리가 당나라 군대와 고구려 군대라는 바깥의 프레임으로 이탈하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안시성주 양만춘이라는 사람이다.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 ⓒ NEW

 

시대로부터의 호응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이야기에 호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업 영화의 흥행은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 깊은 연관이 있는바, 이른바 영화는 시대의 부름을 받는다는 이 논리가 <안시성>에서도 엿보인다. 아마도 이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명확한, 베일에 싸인 사실들에 대해 자신의 신념을 꿋꿋히 지켜야만 하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는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를 보는데, 결론 지점에 가서는 시작과 이야기가 딴 판인 사건들이 꽤 많다. 그때마다 우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사실인 것 같은 이야기도 점점 커져서 거대한 싱크홀처럼 변하거나, 사실이 아닌 듯한 이야기가 진실일 때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거짓이어서 사건을 주목하던 이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는 일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의 본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는데 저 사건이 잘못 알려진 것뿐이었으니 내 판단은 결과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라는 식의 '재확인'이 이루어지거나.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게 맞는 판단이었구나라는 식의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거대한 자기합리화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안시성>의 플롯에 비판을 재기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사물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평양성에 구원군을 요청하러간 사물은 분노하는 연개소문에게 "제가 막리지를 배신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영화를 볼 때는 몰라도, 영화를 보고 나서 되짚어 보면 참으로 우스운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주를 죽이라고 명령한 상황에서 안시성주는 이미 척살해야 할 피해자로 지정되었는데,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사물의 대사는 분명 무책임해 보인다. 이 말은 마치, "당신은 가해자이지만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렇게 들으면 우리는 이 영화의 플롯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사물은 분노한 연개소문에게 무릎을 조아리면서 "그도 고구려 사람입니다.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연개소문은 위기에 처한 '배신자'에게 지원군을 보내준다. 말하자면 '고구려'라는 나라 수호의 대의가 그들의 싸움을 중재해 버린다. 그러나 과연, 대의를 위해 가해와 피해 사실 모두가 흐트러질 수 있던가? 역사적 사실을 벗어나 판타지 창작극인 이 영화에서 안시성주와 연개소문 모두 선과 악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인물인데,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둔다는 말은 마치 그 모든 사실들을 정말로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대의 속에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이 침몰하고 마는 여러 사건들을 줄곧 관찰해야만 하고, 어떻게든 그 끝을 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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