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긴 벤투 감독 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칠레 경기. 벤투 축구 대표팀 감독이 경기 시작 전 생각에 잠겨 있다.

▲ 생각에 잠긴 벤투 감독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칠레 경기. 벤투 축구 대표팀 감독이 경기 시작 전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파울루 벤투 감독이 한국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서의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감했다. 첫 경기였던 코스타리카전(2-0)에 이어 11일 열린 칠레전(0-0)을 무승부로 마치며 대표팀은 지난 러시아 월드컵 이후 신임 감독 체제에서 1승 1무, 2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준수한 성적표를 받아들며 새 출발의 청신호를 밝혔다.
 
'강한 압박'의 칠레 만나 고전한 축구대표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벤투 감독의 축구 색채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벤투호는 후방에서의 빌드업과 강한 압박을 바탕으로 한 공격축구를 시도했다. 적극적인 전진패스와 측면 위주의 빠른 공격전개가 돋보였다. 포백을 바탕으로 한 4-2-3-1 전술로의 회귀도 눈에 띄었다. 벤투 감독이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부터 선호해왔던 전술이다.
 
벤투 감독은 이번 대표팀 명단을 지난 러시아 드컵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멤버들 위주로 구성했다. 벤투 감독은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아직 직접 선수들을 일일이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에 벤투 감독은 1기 명단을 구성하는 데 지난 월드컵 예선과 본선에서 활약했던 선수들과 축구협회가 제공한 데이터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확연히 달라진 경기 운영 방식은 전임 신태용호와 차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코스타리카와 칠레전은 확연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한국이 경기 주도권을 움켜쥐고 상대를 압박했던 코스타리카에 비하여 남미 챔피언 칠레를 상대로는 상당히 고전했다. 경기를 앞두고 수원 시내에서 일부 선수들의 인종차별 제스처 논란으로 비판을 받았던 칠레였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한국보다 먼저 잡혀있었던 일본에서의 평가전 일정이 지진 사태의 영향으로 취소되면서 체력 비축과 시차적응을 완료한 것도 한국전에서 좋은 경기력이 나올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칠레의 강한 중원 압박 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칠레 경기. 손흥민이 패스 줄 곳을 찾고 있다.

▲ 칠레의 강한 중원 압박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칠레 경기. 손흥민이 패스 줄 곳을 찾고 있다.ⓒ 연합뉴스


칠레의 강력한 전방위 압박은 벤투호의 빌드업 축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코스타리카전과 달리 한국은 칠레의 압박에 밀려 백패스가 늘어났고 수비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후방 빌드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골키퍼 김진현과 수비수 장현수의 불안한 볼 컨트롤, 풀백 홍철의 부상 교체 등 변수까지 생기면서 수비 조직력이 크게 흔들렸다.
 
손흥민-황희찬 등 2선 공격수들이 수시로 수비까지 가담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면서 최전방의 황의조나 후반 교체된 지동원도 모두 고립되며 공격을 풀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무실점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수비가 완전히 무너지며 결정적인 찬스를 내준 장면이 수 차례 나왔다. 칠레 공격수들의 마무리 미숙으로 한숨을 돌렸으나 사실상 실점이나 다름 없는 장면이었다. 4년 뒤 카타르 월드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벤투호에서 칠레 수준의 강팀을 만났을 때도 빌드업 축구로 맞불을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앞으로 벤투 감독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점유율 축구의 사례, 이를 뒤집었던 '카잔의 기적'

사실 한국축구는 이전에도 빌드업과 점유율 위주의 축구를 대표팀에 이식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슈틸리케 전 감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로 끝났다.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만 고집하는 단조로운 주전 의존도-의미 없는 볼점유율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전술적 유연성'이 떨어진 것이 공통된 약점이었다.
 
기성용의 특급 패스 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칠레의 친선경기. 기성용이 패스하고 있다.

▲ 기성용의 특급 패스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칠레의 친선경기. 기성용이 패스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히려 세밀함은 떨어져도 강력한 압박과 직선적인 역습으로 대표되는 한국축구 고유의 장점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전임 신태용호의 마지막 경기였던 월드컵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점유율을 포기하고 수비와 역습 위주의 스타일로 회귀하여 이변을 연출한 '카잔의 기적'은 한국축구에 많은 교훈을 남긴 것처럼 보였다.
 
벤투 감독의 축구를 보면서 한편으로 슈틸리케의 데자부가 우려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슈틸리케호도 초반에는 평가전에서의 선전과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 등으로 출발이 대단히 좋았다. 마침 슈틸리케가 중용하는 선수들마다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감독의 전술이나 용병술에 대한 평가도 초반부터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항상 '공격적으로 경기를 지배하는 축구를 추구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후방에서 볼을 돌리는 데 치중하며 겉으로 보이는 볼점유율만 높았을 뿐, 정작 세밀한 부분전술과 마무리 능력의 부재로 영양가 없이 고전하는 패턴이 반복되곤 했다.
 
첫 2연전에서 벤투 감독의 내세운 4-2-3-1 전술이나 빌드업 축구의 단점은 사실 슈틸리케호 시절에도 여러 차례 지적되었던 문제다. 슈틸리케 감독 시절에도 공격수로 자주 중용받았던 지동원-황의조는 사실상 득점력보다 2선과의 연계능력을 중시한 원톱 카드로 쓰이고 있지만 오히려 공격수 본연의 득점력면에서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최전방에 고립되기 일쑤였다.

대표팀 은퇴를 일단 연기한 기성용에 대한 패스 의존도가 여전히 절대적이라는 것과, 중앙수비수들의 기술력 부족과 잦은 실수, 신태용호 시절 최전방으로 이동했다가 벤투호에서는 다시 측면으로 복귀한 '에이스' 손흥민의 공격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문제 등도 다시 반복됐다.
 
앞으로 벤투 감독이 보여줄 축구색깔은 어떨까

물론 3년의 시간이 주어진 슈틸리케와 달리, 벤투 감독은 아직 대표팀 사령탑에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선수구성이나 전술을 완성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아니었음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2연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이 단지 일시적인 시행착오가 아니라 만일 벤투 감독의 빌드업 축구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면 앞으로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벤투호가 사실상 '슈틸리케 시즌2'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한국축구는 4년 전의 시행착오를 또다시 반복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벤투 감독은 칠레전 이후 앞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빌드업 위주의 축구색깔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과거의 대표팀과 차별화에 대한 소신도 분명히 밝혔다. 분명히 벤투 감독에게는 자신의 축구를 시도할 수 있는 시간과 인내가 주어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나 막연한 환상도 금물이다. 코스타리카전 승리 이후 일시적으로 벤투 감독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곧바로 칠레와의 경기에서 고전하는 모습을 통하여 벤투호가 처한 문제점을 확인한 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벤투 감독의 축구에 대한 냉철한 검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돌파하는 이재성 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칠레의 친선경기. 이재성이 돌파하고 있다.

▲ 돌파하는 이재성11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칠레의 친선경기. 이재성이 돌파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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