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공작> 메인포스터 영화 <공작> 메인포스터

▲ 영화 <공작> 메인포스터영화 <공작> 메인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지난 5월 11일, 윤종빈 감독은 칸 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 상영에서 이 영화 <공작>을 성공리에 첫 공개했다. 자신의 장편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은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액션이 위주가 되는 영화도 아니고, 헐리우드식 첩보물의 형태도 아닌데 미드나잇 섹션에 초대되어 자신 스스로도 놀랐다는 윤종빈 감독. – 미드나잇 섹션에 초대되는 작품들은 대체로 액션이 화려하다. - 그의 말처럼 영화 <공작>은 실존 인물로 북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인 바 있는 흑금성이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첩보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물의 심리를 더 자세히 묘사하는 작품이다.

영화 <공작>은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던 1990년대를 배경으로 정보사 소령 출신으로 안기부에 스카우드 된 박석영(황정민 분)에 대한 이야기다. 이후, 암호명 '흑금성'으로 불리게 되는 그는 북한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에 잠입하는 명령을 받게 되고,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뒤 북측 고위 간부인 리명운(이성민 분)과 정무택(주지훈 분)에게 접근한다. 그 사이 남한 내부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남과 북의 수뇌부 사이에서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이를 알게 된 석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 <공작> 스틸컷 영화 <공작> 스틸컷

▲ 영화 <공작> 스틸컷영화 <공작>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02.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된 것이라 하지만, 스토리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분단된 한반도를 그려내는 다른 영화들이 그랬듯이 불안한 상황적 특성이 발생시키는 위기를 극복하고, 종국에는 서로의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우정을 그려내는 모습. 서로를 적으로 대하던 인물들이 적을 동지로 느끼고 이념을 초월해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아주 가까이는 김성훈 감독의 <공조>(2017)에서도 보여진 바 있었다. 집단의 정세에 따라 적진에 놓인 개인의 상황이 급변하는 것과 같은 설정 또한 기존의 첩보물에서 자주 활용되는 부분이다. 어쩌면 기존의 이러한 설정들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기에 유사한 장면의 표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정형화되어 있는 부분을 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그 흔한 액션 장면 하나 없이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서스펜스를 쉽게 휘발시키지 않으며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 둘째, 내러티브의 확보를 위해 등장시킨 A라는 설정을 B라는 장면으로 확실히 갈무리하며 밀도를 높인다는 것.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농도 조절에 성공한 유머러스한 장면들을 중간중간 삽입하며 무게를 잘 잡아가고 있다는 것.

03.

작품의 처음에 등장하는 오프닝 크레딧의 '액션 담당'이라는 글자가 나왔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 영화에는 액션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무택이 석영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며 위협하거나, 의심받던 석영이 심한 몸수색을 당하는 장면 정도가 가장 격렬한 액션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 기존의 첩보물, 특히 한반도를 배경으로 그린 영화들에 무장한 군인들이 등장하고 서로의 진영을 향해 총격전을 벌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감독에 따르면, 흑금성의 실화에 액션과 관련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대신 영화는 속내를 감추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인물들의 모습과 적진에 홀로 떨어진 석영의 상황적 설정으로부터 서스펜션을 획득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속내를 감추고 북측 인사들에게 접근하는 석영 역의 배우 황정민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청맞고도 날카로운 연기로 극의 중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붙들어낸다. 특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공작 활동을 벌이던 그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에서는 급격한 톤의 변화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물의 입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의 연기력이 더욱 중요했던 까닭은, 명운과의 우정과 같이 적확한 상황이나 텍스트만으로 전해지지 않는 컨텍스트적인 부분들을 배우의 연기로 관객들에게 전달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명운이 건네는 넥타이핀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보여지는 장면들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이어져 있음이 그의 연기를 통해 전해질 수 있었던 까닭이다.

영화 <공작> 스틸컷 영화 <공작> 스틸컷

▲ 영화 <공작> 스틸컷영화 <공작>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04.

내러티브를 획득하는 과정과 이를 갈무리하는 모습 역시 이 작품의 특별한 설정 없이도 끝까지 이야기의 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며, 윤종빈 감독의 세심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내러티브의 여닫음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장편 영화의 경우에는 신경을 써야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고, 전반부의 호흡을 살리기 위해 여러 이야기만 늘어놓다 보니 끝내 갈무리를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 경우에 관객들은 극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고 느끼게 되고, 이는 곧 후반부의 지루함과 황당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에 있어 거의 완벽해 보인다.

여러 장면들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석영을 끊임없이 시험하던 명운이 그의 옷에 직접 배지를 달아주며 북한 사람은 한번 제 사람이 되면 속옷까지 벗어줄 정도로 믿음이 강하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석영이 남측 첩보원임이 분명히 드러나는 증거가 있음에도 탈출을 돕는 행위의 근거가 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석영이 신분 세탁을 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장면은 무택에게 심문을 받았으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길 수 있었던 이유가 되며, 겉으로는 조국을 위하는 듯하지만 자신의 계급 상승을 위한 방법에는 사심을 품던 무택의 탐욕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되어 자멸하게 만든다. 이처럼, 인과관계까지는 아니지만 A와 B로 연결되는 내용상의 확실한 갈무리는 심리적 몰입을 강화시킨다.

05.

전체적으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에도 순간순간 실소를 터뜨릴만한 유머러스한 장면들도 영화의 중요한 장치로 활용된다.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무택과 김명수(김홍파 역)의 예상치 못한 칼 군무라던가, 김정일(기주봉 역)을 촐랑거리며 따라 나오는 강아지라던가, 평소 같았으면 오브제를 활용한 의미적 전달로 활용되었을 명운의 시계와 석영의 넥타이핀이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재미를 주는 연출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시종일관 무겁게 진행되는 작품의 흐름에 호흡할 여유를 주는데, 자칫하면 극의 흐름을 망칠 수 있었음에도 윤종빈 감독은 그 농도를 잘 조절해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영화 <공작> 스틸컷 영화 <공작> 스틸컷

▲ 영화 <공작> 스틸컷영화 <공작>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06.

앞서 설명한 부분들과 별개로, 김 부장이라고 불리는 김명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속내가 다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김명수는 그렇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명운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석영에게 북한 인민들의 어려운 삶과 북 고위부의 부패한 현실에 대해 털어놓는데, 결국 이로 인해 비밀리에 처리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면 그를 처리한 명운 역시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상황적 특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숨겨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김 부장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순진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전에 석영이 시계를 선물했을 때 보였던 반응에서부터 그의 솔직함은 이미 표현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석영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북 수뇌부들끼리의 만남을 주선하는 학성(조진웅 분)의 모습과도 연결되며 씁쓸함을 남긴다.

07.

전작인 <군도 : 민란의 시대> 이후로 4년, 생각보다 공백이 길었다. 하정우 감독의 <허삼관>에 각본으로 참여하고, 장률 감독의 <춘몽>에서는 어설픈 금수저 캐릭터로 출연하기도 했으니 윤종빈 감독이 나름 바쁘기는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그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 북으로 향한 첩보원과 끝내 신의를 보여주는 북측 간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남측 안기부 실장.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이념의 문제를 떠나, 진짜 '공작'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영화 <공작>은 어쩌면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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