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열혈남아> 영화 포스터

<열혈남아> 영화 포스터ⓒ 키노 인터내셔널


'장만옥'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녀의 작품은 각자가 다를 테지만 데뷔 이후 91편의 작품(단편영화와 TV 드라마까지 포함해서)에 출연한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작품'들로 꼽은 영화로는 1990년 안휘 감독의 <객도추한>, 1991년 관금붕 감독의 <완령옥>, 1996년 진가신 감독의<첨밀밀>, 2000년 왕가위 감독의<화양연화>, 그리고 그녀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2004년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의<클린>까지 고작 다섯 편뿐이다.

홍콩에서 태어나 8살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뒤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장만옥은 미인대회에 출전해 2등을 수상하게 된다. 미인 대회 수상자가 연예계에 입문하는 것이 비단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는지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데뷔 초, 성룡 영화와 다른 여러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지만 그녀의 자리는 다른 예쁘장한 배우들로 대체되어도 아무 문제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녀가 지금의 명성과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왕가위 감독과의 작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990년대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작품 속 그녀의 모습 또한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에 각인 되었을 것이다.

왕가위와 장만옥은 1988년 영화 <열혈남아>에서 처음 만난 이후 2004년 <2046>까지 모두 다섯 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왕가위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열혈남아>는 청춘 멜로와 누아르가 결합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장만옥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녀는 유일한 여자 캐릭터로서 여자 주인공의 아련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멜로 감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건달 아화' 유덕화와 '아오' 장만옥의 만남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키노 인터내셔널


1980~1990년대 아시아권에서 홍콩영화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여러 무협 영화들이 인기를 얻었고, <영웅본색>을 위시한 액션 누아르 영화들이 그야말로 붐을 이뤄 10대 소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주윤발 흉내를 내고는 했다. '홍콩 누아르'는 누아르 하부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고, 1988년에 개봉한 <열혈남아> 역시 홍콩 누아르 형식을 따라가지만 멜로의 성격 또한 강하게 띠고 있다.

영화는 건달 아화(유덕화)가 숙모의 전화를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먼 친척 아오(장만옥)를 며칠 재워달라는 부탁을 받는 이 장면은 짐 자무쉬 감독의 1984년 영화<천국보다 낯선>의 시작과 거의 흡사하다. <천국보다 낯선>을 홍콩 누아르로 각색한 것이 <열혈남아>가 아닐까 싶을 만큼(등장인물들의 관계 설정, 두 남녀의 감정이 진행되는 과정 등등), 두 영화는 닮은 점이 많다. 두 영화를 비교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그 얘기는 여기까지.

대만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아오가 폐병 치료를 위해 홍콩에 있는 아화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지만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아오의 치료는 끝이 나고 그녀는 대만으로 돌아간다. 아오가 떠난 후 아화는 자신의 부하 플라이(장학우)가 저지르는 골치 아픈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바쁘게 지낸다. 그렇게 아오의 존재를 잊어갈 즈음 우연히 옛 연인과 마주친 아화는 아오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녀를 찾아간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아화의 운명은 그를 행복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홍콩에서 '플라이가 다른 조직의 두목 토니에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러 떠난 아화는 토니에게 온갖 굴욕과 폭력을 당하고 반송장이 되어 아오에게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불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화와 플라이는 단순한 두목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다. 비록 사회에서 맺어진 형제 관계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가족 이상의 끈끈함이 있다. 플라이에 대한 아화의 애정과 책임감은 그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질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어린 나이에 갱단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작은 조직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타고난 천성이 자신이 속한 세상의 악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화에게 어쩌면 불행한 결말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예감한 듯, 눈물 흘린 아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키노 인터내셔널


아오가 아화에게 사랑을 느낀 것도 그의 여린 내면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아화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일에 딴죽을 걸지도 않는다. 그녀는 지저분하고 삭막한 아화의 아파트를 밥 냄새가 나는 좀 더 따뜻한 공간으로 바꾸고, 두들겨 맞은 플라이가 아화의 집에 찾아왔을 때는 그를 도와 조용히 병간호를 하며, '자신은 아무것도 약속해 줄 수 없다'는 아화의 말에 수긍하는 것은 물론, 아화가 플라이를 구하러 떠날 때도 괜한 말로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녀는 아화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상대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연인을 기다려 줄 것 같은 그녀는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용감한 여성이다(그녀의 용감함은 관계에 있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자세가 아니라 아무리 아픈 사랑이라도 받아들이는 용감함을 의미한다).

<열혈남아>에는 자동차 추격이나 대규모 총격 등 스케일이 큰 액션 대신 일대일의 싸움이나 소규모의 총격 장면에 현실감과 코믹함을 가미한 액션이 나온다. 토니 일당에게 붙잡힌 플라이를 구하러 간 아화가 토니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굴욕을 당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토니는 아화의 바지에 장전된 권총을 집어넣고 그의 복부를 구타하는데 아화가 몸을 굽히고 쓰러졌다가는 장전된 총의 총알이 발사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토니 일당은 플라이의 입에 깡통을 물리고 아화의 가랑이 사이에 그를 눕힌다. 고통을 참지 못한 아화가 결국 쓰러지면서 발사된 총알은 플라이가 물고 있던 깡통을 명중시키고 깡통은 로켓이 발사하듯 그의 입을 빠져나온다. 주인공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최고조로 이를 때 빠르게 교차되는 슬랩스틱과 같은 과장된 몸짓과 표정에 관객은 웃게 된다.

액션 장면뿐만 아니라 감정신(3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엔 조금 닭살이 돋기도 한다)에서도 홍콩영화 특유의 과장된 연기는 계속되지만 관객들은 <열혈남아> 속 인물들에게 쉽게 공감하게 된다. 플라이라는 인물의 가벼움과 연민을 자극시키는 연약함을 동시에 보여준 장학우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가진 것 없어도 자존심과 의리만큼은 목숨 걸고 지키는 아화의 카리스마를 잘 표현한 유덕화, 그리고 아오의 감정을 표정변화만으로 전달한 장만옥까지.

특히, 아화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마치 마지막인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눈물을 글썽이는 아오의 애잔한 모습은 수만 단어의 말로도 전달할 수 없는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아직 신인에 가까운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일 수 있었던 건 왕가위 감독의 연출력에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배우들이 완벽주의자인 그와의 작업이 쉽지는 않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 속에서 배우들의 모습은 다른 어떤 영화에서보다 매력적으로 빛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보기 어려워진 그녀... 아쉽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키노 인터내셔널


1990년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하나인 왕가위 감독 특유의 몽환적인 색감과 조명, 핸드헬드, 스텝프린팅(동작의 잔상이 그대로 이어지며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법으로 왕가위 영화의 트레이드마크다)기법은 그의 데뷔작 <열혈남아>에서도 사용되어 도시의 어두운 감성과 주인공 아화가 처한 현실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장만옥은 왕가위 감독과 다섯 편의 영화를 함께 했는데 <아비정전>에서 정착하기를 거부하는 아비를 사랑하는 수리진, <동사서독>에서는 자신을 떠난 연인의 형과 결혼한 지애인, 자신의 남편과 불륜을 벌이는 여자의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는 <화양연화> 속 수 리첸까지, <열혈남아>의 아오처럼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기다림'라는 꽃말을 가진 달맞이꽃처럼 밤에만 피어나는 아련함을 가진 여인들로 모두 조금씩 닮아 있다(왕가위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이 바로 개인적으로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2000대 중반 이후로 영화계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흥미로운 역할을 찾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그녀의 고백. 배우로서 그녀가 느끼는 고민과 갈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추신. <열혈남아>는 홍콩판과 대만판, 두 가지의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쪽도 해피엔딩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아화가 죽지 않고 교도소에 수감된다는 결말을 가진 대만판으로 개봉을 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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