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시카고> 포스터

<시카고> 포스터ⓒ 신시컴퍼니


1975년, 1926년에 공연된 동명의 연극을 뮤지컬로 옮긴 작품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02년 영화로도 제작되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또한 이 작품은 여전히 각국에서 공연 중이다. 한국에서도 꾸준히 공연되며 관객들을 유혹하는 이 작품, 바로 <시카고>다. 이 작품이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도 또 올라왔다.

오래된 작품이란 것은 두말할 이유가 없겠다. 한국 뮤지컬 판보다 더 냉정하다면 냉정할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서 여전히 공연이 등장하는 이유는 극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짜임새일 것이다. 잘 짜여진 극이 보여주는 해석의 다양성이 현대적 관점에서 안타깝지 않은 것 또한 빼놓을 수 없고 말이다.

뛰어난 쇼 뮤지컬 <시카고>, 여성을 대변하다

쇼 뮤지컬은 특성상 무대 위의 배우들이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다른 서사 중심의 뮤지컬보다 볼거리, 스펙터클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무대 기술이나 예술이 뛰어날지라도 궁극적으로 볼거리는 공연의 안무, 그리고 그것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모습, 즉 배우들이 직접 '쇼'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장르 자체의 특징이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쇼 뮤지컬은 그 '쇼'에 있어서 여성만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써왔다. 쇼 뮤지컬뿐만이 아니다. 뮤지컬 장르 자체가 공연 중에 쇼를 보여줘야 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우선적으로 대상화시키던 것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시카고>는 쇼 뮤지컬의 본분을 다하지만 '대상화'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공평하다.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남성도 함께 대상화 하기 때문이다. 빌리가 처음 등장하여 부르는 'All I care about'은 여성 앙상블들이 빌리를 돋보이는, 이른바 남성 주인공이 여성 댄서들을 끼고 무대를 이끄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후 이 공연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록시'를 부를 때 여성 주인공 록시는 남성 댄서들을 끼고 무대를 이끈다. (역설적이지만) 공평하게 대상화하면서 쇼는 더욱 화려해지고, 여타 뮤지컬이 받는 비판을 교묘하게 피해버리는 것, 이는 <시카고>의 영리함이다.

뮤지컬 팬들도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지만, '뮤지컬계에는 도덕적으로 멀쩡한 캐릭터가 없다'. 가장 극단적으로, 이만큼 주인공이 살인을 많이 저지르는 장르도 드물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극 중에서 주인공이라는 포지션을 담당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연민을 자아내거나, 최소한 극 중에서 옹호 받는다. 서사 예술인 뮤지컬이 그들을 옹호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그들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심리를 노래로, 무대로 보여줄 때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관객들에게 공감될 여지를 얻는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이러한 뮤지컬 장르 자체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이 장르에서 여성 인물의 서사도 남성 인물의 서사와 비슷한 권력을 가진다. 선하디 선한 주인공보다, 악행을 저질렀지만 극 중에서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심리를 적극적으로 관객들과 공유하며 줄거리를 이끌어나간다. '여성' 서사라는 것에 치중하지 말고, 기존의 남성들의 서사를 써내린 것처럼 '사람 대접'을 하며 써내는 것 말이다.

<시카고>의 대표 넘버 '셀 블락 탱고'에서 여성 인물들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살해는 했더라도 범죄는 아니다'라고 말이다. 자신들을 이용하기도 모자라 폭력까지 썼다는 남성 인물들, 그러기에 자신들의 무죄임을 주장하는 넘버는 그 자체로 여성 인물들이 자신의 심리와 사정을 고백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가정 폭력을 이야기할 때 전형적인 연약한 피해자가 아닌 그에 대한 응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모습으로 그려주는 것은 덤이다.

더불어, '셀 블락 탱고'는 여성들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데 집중하는 넘버인데 여기서 여성들에게 살해 당한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짜증나는 짓을 했다는 것부터 자신을 속인 것, 더 나아가 바람을 폈다는 것까지, 다양한 이유로 살해 당했던 남성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셀 블락 탱고'는 아주 섹시한 넘버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는 넘버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남성의 시선 속에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을 했을 때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공포스러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카고>는 '범죄가 쇼가 되어버렸으며, 돈이면 살인 같은 범죄일지라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 현실 사회'를 비판한다. 더 나아가 돈이 없고 언어가 없기에 (영어를 할 수 없어 'no guilty'만을 말하는) 무죄임에도 유죄 판결을 받고 살해 당해야 하는 현실 또한 담아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단한 미국이라고 말이다. 또한 그것을 쇼로 즐기는 대중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담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카고> 텍스트의 목표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아니다. <시카고>는 자기 자신 역시 그 사회를 이용하여 또 하나의 쇼를 만들었다. 여태까지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을 등장시키기는 하나, 그들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뤄내는 극들은 많았다. <시카고>는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있다.

대상화 된 여성성을 벗어나

극 중 인상 깊은 캐릭터들은 벨마와 록시, 빌리뿐 아니라 마마라는 인물이다. 마마는 이름으로도 읽히지만 엄마라는 명사로도 읽힌다. 실제로 그녀는 교도소의 유사 어머니적 성향을 가진다. 교도소의 여성 죄수들을 돌보는 역할 말이다. 허나 그녀의 원동력은 모성이나 자매애 따위가 아니다, '너가 잘한다면 나도 잘한다', '상부 상조'와 같은 물질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그녀는 그 자체로 타락한 사회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벨마와 록시의 조력자로서 극 중에서는 긍정된다.

어머니-성녀-현모양처 등의 매커니즘으로 상징되는 어머니가 아니라 죄수를 돕는 어머니, 그 속에서 어떤 죄책감이나 모성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마마'는 그 자체로 새롭다. 유사-어머니로서 새로운 어머니 캐릭터를 제시하는 셈이다. 물론 단순히 돈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벨마의 경우에는 꽤나 우정 같아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설령 그 우정이 존재할 지라도, 그 우정의 시작이 돈이었다는 점은 새롭다. 사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어머니라니. 동시에 죄수들을 도와 그들이 석방된다면, 도덕과 규범, 질서의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파괴적인 어머니에 대한 복원의 시도로 읽힐 수도 있겠다.

마마뿐 아니라, 벨마와 록시로 보여주는 여성들간의 관계도도 기존의 여성들의 관계성보다는 훨씬 입체적이다. 둘의 관계는 엄청나게 지극한 우정이라기보다 서로를 이용하기에 가깝다. 벨마는 자신의 화제성이 떨어지자 록시를 이용하려 한다. 처음 자신이 더 인기를 얻었는데 왜 그래야 하냐던 록시는 자신의 화제성이 떨어지자, 벨마와의 공연을 이용하지만 거기서 아기에 대한 핑계를 대면서 관심을 독차지 해버린다. 계속 록시에만 쏟아지는 관심에 벨마는 경계를 한다. 하지만 록시에게 꽂히는 관심이 사그라졌을 때, 록시는 다시 또 벨마를 필요로 한다. 둘은 함께 무대에 서며 막을 내린다. 그러면서 꿈을 이루는 셈이다.

어쨌든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자신들의 꿈과 목적을 위하여 인기, 혹은 명성을 위하여 말이다. 더 나아가 흔히 남성 중심적으로 쓰여진 여성 서사에서 자주 벌이던 여성들의 인기를 향한 욕망이 유치하다는 식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이 극을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것도 <시카고>가 칭찬 받을 부분이다.

소수자 서사로서의 의의

소수자 서사로서의 의의는 벨마-록시의 관계를 넘어 빌리와의 관계에서도 보인다. 현재 웨스트 엔드 프로덕션은 빌리를 비-백인 배우로 캐스팅 했다. 그 외의 캐스팅은 대부분 '백인 위주'라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 특유의 '화이트 워싱'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백인 판의 공연 전체에서 비-백인인 인종적 약자 빌리가 살인을 저지른 여성들을 돕는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의 연대기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연대보다 비즈니스에 가깝긴 했다. 돈이 오고 가는 하나의 거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돈이 오고가는 비즈니스로서의 서로 도움이 이 극을 더 새롭게 만든다. 여태까지의 많은 소수자 서사는 소수자들을 갸륵하고, 불쌍하고 뭔가 사연 있는 존재들, '약자'로 보여주기에 급급했다. 이는 오히려 소수자 서사에 제약을 두고, 더 나아가 소수자들에 대한 시혜적 시각의 반영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곤 했다. 1975년에 등장한 이 뮤지컬 <시카고>는 오히려 권력의 위계가 명확히 짜여진 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를 고용하고 그 상대를 위해 일해준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여태까지 비-소수자 서사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타락한 세상에, 타락한 방법으로 맞서지만 그들은 결코 비판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타락했을 지라도, 오랜 메타포로 존재해왔던) 거대한 '질서'로서의 세상에 무죄임을 입증 받음으로써 맞선다.

물론 이는 캐스팅에 따라 존재할 수 있는 의의이고, 사라질 수도 있는 의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당 프로덕션이 보여준 해석의 가능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녀들은 소비 되는가, 스스로 이용하는가?

여성들이 아무리 극 중 댄서나 쇼걸 정도로 등장하지만 그녀들은 현실 사회를 마음껏 뒤흔들 수 있는, 질서에 반하는 균열로서의 존재다. 극의 시작을 여는 대사를 되짚어본다.

"You are about to see a story of murder, greed, corruption, violence, exploitation, adultery and treachery─All those things we all hold near and dear to our hearts. Thank you."

살인, 탐욕, 부패, 착취, 간통과 배반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대놓고 밝히는 이 대사에서 '부패'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본다. 물론 <시카고>가 이야기하는 부패는 흔히 연상되는 것이다. 스포츠를 보듯 살인에 열광하고, 더 잔인하고 자극적인 살인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을 이용하는 언론, 돈으로 살인을 무죄로 만드는 것들... 이들은 모두 흔한 부패의 이미지다. 하지만 모든 주요 인물들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부패를 연상시켜본다. 그건 가장 오래된 부패이자 고착화 된 권력, '남성 중심적 사회'이다.

자신의 남성 연인을 쏴 죽이는 여성들, 그들의 행위는 살인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행위 자체보다 남성 권력에 대한 대항의 상징성으로 말이다. 가십으로라도, 그녀들로 인해 사회는 흔들린다. 물론 대중들은 그녀를 소비한다. 그녀들이 대중들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이라는 비판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공연한다. 또한 그들은 석방 되었다. 살인을 한, 공포스러운 두 존재는 사회에 버젓이 존재한다. 그것도 인기를 얻으면서 말이다. 무대에 서서 춤추고 연기하는 벨마와 록시는 그 자체로 세상에 균열을 내는 존재들로 읽힐 수 있다. '남성 중심적 사회'라는 커다란 부패에 대해 말이다.

해석의 가능성에 어느 정도 기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시카고>는 완벽한 극은 아니다. 일단 이 극이 '쇼 비즈니스'라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는다. 당장 가장 접근성이 좋은 프로덕션인 영화가 그러하다. 영화 <시카고>는, 흔히 쇼 뮤지컬들이 저지르는 여성만을 성적 대상화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더 나아가 백인 배우로 연기된 빌리는, 빌리라는 캐릭터성 때문에 백인 남성들이 만들고 짜놓은 세상에서 놀아나는 인간들 그 이상 그 이하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는 영화 다음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한국 프로덕션에서 표현되지 못할 영역이기도 하다. 한국 뮤지컬계의 특성 상, '화이트 워싱'의 문제점은 없지만 인종적인 재현도 거진 불가능하기에 빌리는 그냥 남성 캐릭터로 그려질 것이라는 점이다. 웨스트 엔드의 빌리도, 어느 정도는 얻어 걸린 해석인 듯 하지만, 그 '얻어 걸림'의 여지도 사라짐은 상대적으로 아쉬운 영역이다. '백래시'로 작용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남성을 살해하는 이유가 죄다 이성애에서 비롯되는 것도, 이 극의 매력이 되었다가 한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버전의 <시카고>가 등장했다. 이는 2018년에도 '꿀리지' 않는, 그리고 몇몇 부분에서는 심지어 귀감이 될 수 있는 서사임을 보여준다. 세련되고 재밌다. 여성 서사는 늘 있었다, 너희가 해석을 남성 중심적으로 해왔을 뿐이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늘 존재했다. 핑계 대신 이걸 뛰어 넘는 작품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성 서사는 여성을 같은 사람으로 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등의 다양한 메시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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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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