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흑과 백이 아닌 이분법의 연속에서

영화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에게 에드워드 양 감독은 생소한 편에 속한다. '대만'이라는 국적과 '뉴웨이브'라는 예술가 딱지가 왠지 모를 거리감을 만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걱정을 안고 영화관에 입장한 당신은 끝내 찬사를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증거로 최근 국내에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개봉해 좋은 반응을 받았다. 그에 힘입어 감독의 유고작인 <하나 그리고 둘>이 오는 28일에 재개봉한다.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8위에 오르기도 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명성과는 별개로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 영화는 2000년에 개봉했는데, 당시 대만 영화의 대만 시장 점유율은 단 2%에 불과하여 정작 대만에서 상영되지 못했다는 뒷사정이 있다. 물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대만 사람들도 대만 영화를 모르고 우리도 대만 영화를 잘 모른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일반 관객들이 익히 아는 대만 영화가 <나의 소녀시대>나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상업 영화인 것을 떠올려 본다면 에드워드 양의 예술 작품이 외면받을 수도 있다고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다. 상업영화의 달콤함과는 달리,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마치 한 편의 풍경화와도 같아서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미묘하게 축조된 세계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 보내도 매 순간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에드워드 양의 세계가 대만인의 삶을 그리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 중산층의 일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알다시피 세계 어디를 가나 산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이란 우리네 삶과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삶의 고단함을 제하고도 대만 영화와 한국 영화는 그 분위기가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그건 두 나라가 일제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도 그렇다. 윗부분이 북한으로 가로막혀 사실상 섬처럼 취급되는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도 타이완 섬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 유사성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대만 영화는 어딘가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힘

이 영화를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건 권장하고 싶지 않다. 기술적으로도 훌륭하지만, 감독 본인이 일평생 대만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머리보단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굳이 언급하자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타인의 삶을 3시간 동안 유기적으로 엮어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3시간 동안 대만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시선을 지닌다. 하나는 가족 중 가장 나이 든 할머니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어린 8살 손자의 시선이다. 영화는 결혼식장에서 시작해 장례식장에서 끝을 맺는데, 두 장소 모두에 할머니와 손자가 있다. 가장 늙었고 가장 어린, 삶을 시작하는 곳과 삶을 끝내는 곳이라는 수미상관의 구조에서 그 양쪽을 잇는 중심점은 어디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양극단에서 두 가지 시선을 끌어오고 그 타협 지점이 있을지를 묻는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흔한 이분법의 구조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 것들은 한쪽으로만 흐를 뿐 반대로 거스르지는 못한다. 비유하자면 '엔트로피(entropy)'다. 엔트로피란 에너지가 풍차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인물이 겪는 사건과 감정이 시간대로 흘러가며 주변 인물에게 다른 형태로 영향을 미치지만, 그 반대는 불가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역사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른 형태로 비슷한 결과를 자아내는 동력원은 마치 '엔트로피'다.

영화에서 엔트로피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손자의 아빠 'NJ'는 30년 전 첫사랑을 만나지만 그녀를 뿌리친다. NJ의 아내는 할머니가 쓰러진 후 슬픔에 빠져 집을 나간다. 그 외에도 여러 사건이 NJ 가족 각자에게 벌어지지만 끝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은 순탄하지는 않다. 그건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동시대의 모두가 다음 주자를 향해 내미는 바통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들이 다음 장면에서 벌어질 사건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영화는 이 엔트로피 형태를 손자 '양양'을 통해 통렬하게 부수어 낸다. 이른바 '네거티브 엔트로피'라고 부르는 것이다. 플루서라는 사람은 풍차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삶을 거스를 수 있게 된 게 '기술의 발달' 덕택이라고 보았다. 쉽게 말해, 사진기나 컴퓨터로 삶을 기록할 수 있게 되어 더는 현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은 더는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기록의 힘'이며, '시대의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뒤통수를 찍는 소년

영화 중간에 쓰러진 할머니는 영화 마지막의 장례식장에서 영면에 든다. 반면 손자 양양은 그런 할머니를 향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 든다.

이때 양양이 하는 말 중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말이 있다. 이 짧은 문장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사실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시기에 흩어질 에너지를 부여잡는 '네거티브 엔트로피'의 힘이다. 양양은 곧 흩어져 남들이 보지 못할 것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양은 아버지로부터 카메라 하나를 선물 받는데, 그 카메라로 주변 사람들의 뒤통수를 찍고 다닌다. 사람들이 왜 멀쩡한 사진이 아니라 뒤통수만을 찍냐고 묻자 양양은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뒤통수를 일평생 볼 수 없다"고 말이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사람은 일평생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유명한 문구처럼 우리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지 못한다. 거울이나 카메라와 같은 도구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내 뒤통수가 어떠냐고 물어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면서 다른 이들의 수많은 뒤통수를 보는데 대부분은 그들을 떠나보낼 때다. 그래서 뒤통수란 이별의 상징이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밟고 지나가야 할 디딤돌처럼 여겨지고는 한다.

이러한 양양의 태도는 다시금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데, 사람은 관속에서 하늘을 보며 눕지 바닥을 향해 눕지는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나이가 든 할머니는 정면을 향하게 되고 나이가 어린 양양은 뒤통수만을 본다. 할머니는 죽음으로써 영영 앞으로 나아가게 되고, 양양은 그 중간중간을 담아두려 카메라를 사용한다. 그러니 그것은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흑과 흑이 아닌 것' 사이에 담긴 여러 색을 담으려는 시도다. 그 여러 가능성 중에 백색도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대비 속에서 중심을 찾아가며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건 마치 1과 4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2와 3을 찾아내어 다시금 그 중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며

사실, 영화가 내보이는 '중간의 태도'는 양양에게서만 관찰되는 게 아니다. 영화는 인물의 대사와 카메라 모두를 동원해가며 관객들에게 그 사실을 신신당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카메라 연출은 '거울'이다. 카메라는 창가나 거울 속에 비친 인물의 모습에 초점을 둠으로써 현실을 교묘히 피해간다. 개중에는 CCTV나 인화된 사진처럼 기계적인 시선도 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직접 인물을 목격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본다. 그러니 실제보다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왜곡으로 어긋난 현실을 덮어보려 시도한다.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그 장면들은 밖의 풍경과 안의 풍경이 겹쳐져 있으므로 몹시 희미하다. 말하자면 안과 밖이 섞여 있고, 그건 마치 '중간'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은 이미 알고 있고 밖은 아직 모른다는 점에서 '중간'을 현재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중간을 보는 것은 현재를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의 시도는 현재를 보려는 시도다. 혹자는 이미 우리가 현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지금 당장 옆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른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예를 들어,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뒤늦게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는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던 중이었을 것이고,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호들갑을 떨지만 다시금 잊어버리고 만다. 기계의 힘을 빌려 현재를 기록하는, 에너지를 거스르는 '네거티브 엔트로피'의 힘은 그런 것들을 기억하려는 시도다.

인물의 대사들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매일 반복되는 건 불확실함 뿐인데 왜 눈을 떠야 하는지 의문이에요"라고 묻자, 이후의 장면에서 NJ는 이렇게 독백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매일은 모두에게 처음인데, 왜 그걸 두려워해야 하지?" NJ의 대사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에너지'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바라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엔트로피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는 "지금 이 순간이 새로운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또한, NJ는 술자리에서 간단한 마술을 선보이며 "이건 마술이 아니야. 나는 모든 패를 알고 있어."라고도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을 통해 과거현재미래를 통칭하며, 그것을 패를 뽑는 '지금 이 순간'으로 비유함으로써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대만 중산층의 2000년대가 아니라 대만사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건 딱히 시간에 얽매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왔던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는 '지금 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그 일이 '해왔던 일'이 되면 다시금 양극단 사이에서 '지금 하는 일'이 새로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건 현재를 산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 그리고 둘. 그 뒤에 끝없는 수의 행렬이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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