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푸른영상


1997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노해 시인은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발간한다.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과 노동 해방을 울부짖던 박 시인의 전작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과 달리 종교적인 색채와 땅과 사람, 농민을 강조하는 박노해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가 박노해'를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1997년 제작된 오정훈 감독의 <세발 까마귀>는 박노해의 변화를 통해 시대적인 대안을 찾고 싶었던 감독 개인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박노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기획되었지만, 박노해는 옥중에 있었다. 오 감독은 박노해의 가족, 친구, 그와 함께 노동-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박노해를 조금씩 알아가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박노해를 통해 시대적 대안을 찾고 싶어 했던 영화는 박노해가 아닌 박노해의 주변 지인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궁금증의 실마리를 찾고 그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시작은 분명 박노해였지만, 당시 수감 중이던 박노해가 아닌 현실에 발붙이고 제각각 살길을 모색하는 박노해 지인들을 강조하며 감독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세발까마귀>를 통해 감독이 찾은 시대적 대안은 무엇일까. 명확히 답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일단 현실에 몸소 부딪쳐보는 걸로 실마리를 찾은 듯하다. 이념과 이데올로기, 집단문화가 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80년대와 달리, 개인의 주체적인 역량과 자유를 강조하는 90년대엔 그에 맞는 생활방식도,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뿔뿔이 흩어지는 운동의 흐름 속에 80년대 사회주의, 노동 등 진보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감행하게 될까.

 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푸른영상


20년 전 이야기이지만, <세발 까마귀>는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러모로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래도 격변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 진보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던 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비해 201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은 다수 시민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나마 최근 들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있다면, 미투운동(#MeToo) 등 페미니즘(여성) 운동 정도다.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호응을 얻어가는 이유는 실제 여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양성평등문화가 조성되었다고 한들 여전히 사회 내 만연한 성차별, 남성 중심적 권력 위계 질서구조가 빚어낸 권력형 성폭력,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범죄, 데이트 폭력, 외모지상주의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여성들은 페미니즘에 자연스럽게 동조하게 되고 운동의 물결에 합류하게 된다. 결국 영화 <세발 까마귀>가 강조했던 '몸으로 증명하는 삶'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고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사회 운동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세발 까마귀>(1997) 한 장면ⓒ 푸른영상


노동 해방을 울부짖던 혁명가에서 참선하는 사색자로 변신한 박노해의 변화에 의문을 품은 <세발 까마귀>는 현실에 발을 디디며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말보다 몸(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화는 아직은 서툴지만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뿌리 내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 사람들과 함께 변화된 시대와 그에 맞는 삶을 준비하는 고민과 성찰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박노해의 옥중 사색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수록된 시 '세발 까마귀'에서 제목을 따온 영화는 치열한 두 발의 맞섬과 교차 속에 내일을 여는 또 하나의 발이 나온다는 '세발 까마귀'의 내용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시대의 성찰과 변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나날이 변화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말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부딪치며 삶을 증명하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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