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입니다. 뭔가 어린 티를 벗고 어른이 된 것 같은데,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초짜'이고 스스로도 자기 능력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상태죠. '살 날은 많으니 어떻게든 잘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앞이 안 보이는 현실이 막막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최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이런 청춘의 초상을 담으려 노력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청년 세대가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얻거나 공감을 표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의 삶보다는 감독 자신의 예술적 야심이 더 두드러져 보인 영화에 가까웠으니까요. 감독의 의도와 주제 의식은 존중하지만, 젊은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보려는 자세는 다소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버닝>보다 영화적 완성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훨씬 더 진정성 있게 젊은 세대의 문제를 다룬 영화는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간 국내에 소개된 영화 중 청춘의 삶에 대해 진솔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 작품 4편을 골라 봤습니다.

여러 좋은 작품들이 많았지만,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우선순위를 뒀습니다. 따라서 9.11 테러 직후의 미국이 배경인 <레이디 버드>(2017)나 1960년대 영국이 배경인 <언 에듀케이션>(2009) 같은 작품은 아쉽지만 제외했습니다.

<사람 만들기> - 현재의 분노에서 미래의 삶으로

 영화 <사람 만들기>의 포스터

영화 <사람 만들기>의 포스터 ⓒ Universal Pictures


자존감이 부족한 젊은이들은 종종 까닭 모를 흥분에 휩싸여 사고를 치곤 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눈이 뒤집히거나, 자기 분을 못 이겨 일을 저지르곤 하지요.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좀 더 책임감 있게 행동했어야 했다'며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요.

<사람 만들기>의 주인공 대니(폴 러드)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친구 휠러(숀 윌리엄 스콧)와 함께 10년째 에너지 드링크 판촉 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30대 중반이 됐는데도 '고작 이런 거나 해야 하나' 싶어 자괴감에 빠져 있죠.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로펌 변호사인 여자친구 베스(엘리자베스 뱅크스)에게 느닷없는 프러포즈도 해보지만 역시 거부당합니다. 급기야 불법 주차 견인 차량과 시비까지 붙어 휠러와 함께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감옥에 가는 대신 법원이 지정한 단체에서 청소년의 친구가 되어 주는 150시간 사회봉사를 선택하지만, 이것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수위 높은 농담이 오가는 미국식 코미디 영화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황당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존감이 떨어진 젊은 세대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고 나름의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젊은이의 일상적인 분노가 축적되고 폭발하는 과정을 초반 10분 동안에 다 정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상영 시간은 제목처럼 '사람 만들기'에 투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고 매사 책임감이 없었던 대니와 휠러는 어린 친구들과 지내면서 연대 의식과 책임감을 배우게 됩니다. 이들의 '성장'에는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는 대신, 타인과 진심으로 교류하고자 하는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데이비드 웨인은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나온 청춘 코미디 수작 <웻 핫 아메리칸 썸머>(2001)의 감독입니다. 그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젊은 세대의 문제를 코미디라는 형식에 담아왔습니다. <사람 만들기>는 네이버 N스토어와 구글 플레이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 신선한 계층 간 대립 구도와 청춘의 희망

 영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의 포스터.

영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의 포스터. ⓒ (주)티캐스트


청년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학, 취직, 결혼, 집안의 우환 같은 것들이 그것이죠. 그중에서도 아이를 갖는 일은 젊은이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삶의 무게 중심이 아이 쪽으로 좀 더 이동하게 되는 것은 물론, 아이를 사회의 일원으로 길러내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아래 <앤젤스 셰어>)의 주인공 로비(폴 브래니건)는 하는 일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전형적인 영국 노동 계급 백수입니다. 그는 폭력 사건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된 와중에 여자친구의 출산 소식을 듣습니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제는 뭔가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의 삶에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죠. 그런데, 의외의 방면에서 돌파구가 생깁니다. 사회봉사 감독관의 집에서 난생처음 마셔 본 싱글 몰트 위스키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에게 타고난 미각과 후각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로비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위스키 경매 소식을 듣고 일생일대의 반전을 계획합니다.

<앤젤스 셰어>는 평생 노동 계급의 삶을 다뤄온 켄 로치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위트 넘치고 따뜻한 작품입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고 볼 수 있는 일종의 케이퍼 영화(caper film: 값진 물건을 훔치려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범죄 영화의 한 장르. 흔히 블랙코미디 요소가 가미된다)인데, 거짓말 같은 해피엔딩으로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로비와 그 친구들의 성공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며, 여전히 극심한 빈부 격차와 막막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짚어 주는 것도 잊지 않죠.

전체적으로 사회 계급의 차이를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도 하층 계급의 능동적인 에너지에 주목합니다. '냉혹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직업도 미래도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저 한심한 존재가 아니라 고민과 유머와 책임감, 그리고 선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그대로 구현된 것이죠.

특히, 켄 로치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여성 인물을 주체적인 한 명의 인간으로 묘사하는 태도가 좋습니다. 요즘 어떤 감독들은 영화 속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을 지적하면, 나이 탓을 하며 자기가 구세대라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켄 로치 감독이 80세가 넘은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변명은 좀 구차해 보입니다. 여성 묘사는 '나이'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니까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는 2012년 칸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IPTV 3사와 pooq, 왓챠 플레이, 네이버 N스토어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분노> - 비슷한 분노, 더 야심 찬 기획

 영화 <분노>의 포스터.

영화 <분노>의 포스터.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청춘의 특권 중 하나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거리낌 없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입니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아직 살아갈 날은 훨씬 많이 남아 있고,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지혜 역시 성장의 밑거름이 되곤 하니까요. 어쩌면 이것저것 따지고 좌고우면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젊은 세대답지 않은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분노>는 일본의 인기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도쿄 한복판에서 '분노 범죄'로 추정되는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같은 시기에 용의자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각기 다른 세 명의 젊은 남자가 도쿄, 치바, 오키나와에 홀연히 나타납니다. 이들은 모두 해당 지역에 사는 또래 젊은이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지요. 그러나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면서 싹트기 시작한 의심은 이들의 관계를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갑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모두 일본 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입니다. 사회적 편견의 희생양이거나 일본 내에서 변방으로 취급되는 곳에 거주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귀게 되더라도 쉽게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찬찬히 여유 있는 호흡으로 따라잡는데, 이는 긴장감을 증폭시켜 이야기에 흥미진진함을 더할 뿐 아니라 관객에게 각자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일본 작품이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버닝>과 유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청년 세대의 불안과 희망, 분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성장담이나 극적인 해피엔딩을 배제한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도쿄 신주쿠에서 오키나와 주변의 무인도까지 두루 조망하면서 일본 청년들의 다양한 고민을 아우릅니다. 또한 연출자의 자의적인 판단을 가능한 한 유보하고 인물이 처한 상황을 관객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이상일은 재일교포 3세로서 <69 식스티나인>, <훌라걸즈>, <악인> 같은 작품을 통해 젊은 세대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해온 감독입니다. 이번 작품 역시 그동안 보여준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담겨 있습니다. <분노>는 IPTV 3사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땐뽀걸즈> -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가 전하는 온기

 영화 <땐뽀걸즈>의 포스터.

영화 <땐뽀걸즈>의 포스터. ⓒ KT&G상상마당


형식적인 완성도는 예술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입니다. 숙련된 장인의 손으로 만든 명품이 쾌감을 주듯, 잘 만들어진 예술 작품 역시 감상자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감동을 전합니다. 소재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 있는 접근 방식이 형식상의 부족함을 뛰어넘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죠..

<땐뽀걸즈>는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땐뽀(댄스 스포츠)반'의 지도 교사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전국 단위 동아리 경연대회 발표를 앞둔 학생들은 모두 졸업 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예정입니다. 이들은 각자 집안 형편은 다르지만, 댄스 스포츠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모두 같습니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 있죠.

이 영화는 지상파 다큐멘터리 방송 프로그램인 < KBS 스페셜 > 방영본을 극장용 장편으로 재편집하여 내놓은 작품입니다. 연출을 맡은 이승문 감독 역시 극장용 장편은 처음인 KBS 시사 교양 PD입니다. 그래서 여타 작품보다 기술적 완성도가 썩 높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만큼 청춘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빚어내는 온기를 제대로 전달한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인물을 스케치할 때도 독백이나 인터뷰하는 장면은 최소화하고, 인물과 인물이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선생님, 동아리 친구들, 부모 형제들, 학교 밖의 친구와 나누는 인간적인 감정들은 특별하진 않지만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 속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울고 웃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짓거나 박장대소하게 되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소통을 포기하고 자기만의 세계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풀어나가야지, 혼자 고립되기 시작하면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돼 버립니다. <땐뽀걸즈>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삶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다른 이와 나누고, 인간관계 안에서 풀어갈 줄 아는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보는 사람에게 희망을 전해줄 것입니다. <땐뽀걸즈>는 IPTV 3사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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