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은유로 가득 찬 영화를 봤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바람, 끝이 보이지 않는 잿빛 세상에 던져진 희망 없는 청년의 삶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펼쳐낸 <버닝>이다.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이다. 이창동 감독은 시나리오에서 청년들의 충족될 수 없는 결핍과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현실의 불안을 담아냈고, 연기자는 내적 불안과 냉소적인 연기를 잘 펼쳐냈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영화에는 팬터마임을 배우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는 해미, 소설을 쓰는 문예창작과 졸업생 종수,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베일에 싸여 있는 벤 등이 등장한다. 두 달에 한 번씩 불필요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은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종수를 중심으로 흐름이 전개되는데, 줄거리와 묘사를 보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아 관객이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한눈을 팔아선 안 된다.

영화에서 아프리카 원주민의 춤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현실의 팍팍한 생존에서 느끼는 결핍 리틀 헝거(little hunger)에서, 인간 본질의 삶의 의미를 찾으며 느끼는 결핍인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 결핍의 몸부림은 가장 연배가 높은 할머니의 북소리에 맞춰 노을이 질 무렵부터 새벽녘까지 이어진다는 춤으로 표현된다. 무력하게 뻗은 팔 아래로 축 처진 두 손은 일정한 리듬과 스텝을 밟으며 점점 위로 치켜 올려져 하늘을 향해 생의 염원을 담아 기원의 제의를 올리는 듯 온몸의 에너지를 끌어 올리는 몸짓으로 표현된다.

종수는 아르바이트로 물건을 배달하러 갔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해미를 만난다. 하지만 해미는 성형 수술을 해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종수는 알아보지 못한다.

영화의 두 단면을 이루고 있는 삶의 모습은 극과 극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해미의 좁은 방에서 바깥을 올려다 보면 천상의 사다리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서 있는 타워가 보인다. 반면 벤이 사는 집은 넓고 아늑하다. 벤의 집과 종수가 돌아와 살고 있는 집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 실제 삶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심리적인 결핍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 속 장면들의 의미

영화에서 해미는 팬터마임으로 귤을 까서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해미는 '실제로 귤이 없다는 사실을 머리에서 지우고 눈앞에 귤이 있다고 상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이며 실제로 귤을 먹는 것 같은 연기를 펼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연기로 현실에서의 결핍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동안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고양이는 살던 집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직접 해미의 집으로 와서 먹이를 주라고 한다. 부탁을 받은 종수는 가끔씩 찾아가 먹이와 물을 주고 변을 치워주지만 실제로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는 못한다.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해미는 여행에서 만났다는 의문의 남자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씩 '불필요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고백을 한다. '비닐하우스는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상은 아무도 비닐하우스가 태워 없어지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벤은 종수에게 종수 집과 가장 인접한 곳에서 태우기에 적합한 비닐하우스를 발견했고 태울 예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후 종수는 타버린 비닐하우스를 찾아 헤매지만 정작 실제 불에 탄 비닐하우스는 보이지 않는다. 벤과 종수 집에 들렀던 해미는 종수와 연락이 끊기고, 벤의 집 화장실에서 종수는 자신이 해미에게 준 핑크색 손목시계를 발견한다. 이에 종수는 벤을 추적한다. 벤이 두 달에 한 번씩 심장의 베이스를 느끼기 위해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는 과연 무엇일까?

종수는 벤의 집에서 고양이를 보게 된다. 이 고양이를 보고 종수는 자신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해미의 고양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고양이의 이름이 '보일이'인 것, 해미가 우물에 빠졌다는 우물의 실재 여부를 알 수 없는 것도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해미의 가족은 우물의 실재 여부를 부인하지만 20년 만에 다시 아들을 찾아 온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우물은 마른 우물이었다고 말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른 우물이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스터리 영화인 만큼 영화의 장면 장면을 보며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전개되는 과정이 현실인지 종수가 창작하는 소설의 내용인지도 관객의 해석에 달렸다. 단 한 가지 관객이 수긍할 공감대가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들은 현대인의 결핍과 갈망,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리틀 헝거든 그레이트 헝거든 결국 어떤 식으로든 결핍을 지닌 채 살아가는 존재이니 말이다.

 버닝

영화 <버닝>의 스틸컷 ⓒ CGV 아트 하우스



버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