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배워서 남줄랩> 중 일부.

EBS <배워서 남줄랩> 중 일부. ⓒ EBS


한 달 전 Mnet <고등래퍼> 시즌2가 종영했다. 시즌2는 김하온과 이병재 등 여러모로 빛나는 래퍼들을 많이 발굴했다. 더불어 시즌1에 비해서는 참가자들의 사생활 논란도 거의 불거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작발표회에서 제작진이 밝혔듯, 참가자를 대상으로 3차에 걸친 면담을 진행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부모 혹은 친권자와 통화를 거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 가능성을 사전에 최대한 차단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는 나름 성공한 듯하다.

'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야 할 수 있지만, 같은 방송사의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가 매번 논란을 일으키는 것과 비교해보면, <고등래퍼>가 '논란'에 몸을 사리는 건 사뭇 흥미로운 모습이다.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친권자와 연락을 했다는 <고등래퍼> 시즌2 제작진의 모습을 보면서, '10대의 힙합'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어른 관점'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다. 불온해서는 안 되고, 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고등'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그들은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지만 잠깐 공부를 멈추고 랩을 하는 건 예외적 상황인 것이다. 자퇴생도 있고 열등감에 절어 자해도 여러 번 한 참가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학생다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용인 가능하다.

지난 4월 23일 첫 방송을 한 교육방송(EBS) <배워서 남줄랩>(아래 <남줄랩>)은 그간 EBS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힙합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청소년 래퍼들이 출연해 랩을 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고등래퍼>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남줄랩>은 <고등래퍼> 시즌2가 보여준 시각적 한계를 극복했을까?

배워서 어른들에게 보여주는 힙합

 EBS <배워서 남줄랩> 방송 중 일부. 10대들의 힙합은 교훈적이어야 하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1987년의 이야기를 힙합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EBS <배워서 남줄랩> 방송 중 일부. 10대들의 힙합은 교훈적이어야 하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1987년의 이야기를 힙합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 김민준


"학교 밖 세상이 궁금했던, 세상에 할 말 많은 십말이초 래퍼들이 묻는다. 그리고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어른들이 '민주시민교육'을 제안한다. 각 분야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특별한 수업과 거침없는 십말이초 래퍼들의 예리한 질문이 만났다. 그리고 강연에서 배운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래퍼들의 '남줄 랩' 공연까지."

<남줄랩>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프로그램 소개글이다. 보고 있으면 '민주시민교육'과 '명사들의 특별한 수업'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tvN의 <어쩌다 어른>이나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같은 강연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었나 싶기도 하다.

1회 방송분에 나온 MC 김숙의 한 마디에 이 방송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듯하다.

"(새로운 지식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건) 래퍼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프로그램 안에서 '힙합'은 교육적인 기능을 해야 하며, 교육 대상은 10대다. <고등래퍼>는 '10대들의 힙합전쟁'을 표방했는데, <남줄랩>은 이런 유희적인 기능보다는 전달과 교육의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주로 성인들이 출연하는 <쇼미더머니>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그 존재감을 과시하지만, 그 파급력을 성찰하기 보다는 '원래 힙합은 이런 것이다'라는 잘못된 편견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남줄랩>의 10대들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하고, 모범적이어야 하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교과서로 공부를 하지 않을 뿐이지 결국 촬영장은 또 다른 교실이며 그들의 랩은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이미 방송에서도 '수업', '숙제'라는 표현을 쓰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노명우 교수와의 '수업'을 살펴볼까. 노 교수는 1987년의 민주항쟁을 이야기하면서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좀 더 좋아졌다는 취지의 수업을 한다. 이 말 자체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좀 다르다. 앞서 <쇼미더머니>, 더 나아가 <고등래퍼>조차도 '너희들은 힙합에 대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라고 방향성을 제시해주진 않았다.

만약 <쇼미더머니>에서 성인 래퍼들을 상대로 인문학 수업을 하고 어떤 철학적 가치가 있는 가사를 쓰라고 했다고 해보자.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그림이 아닌가. 오히려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청소년들이 힙합을 말한다고 하니, 굳이 방향성과 기준 그리고 규범을 정해주는 걸까? 방송에 나온 래퍼들은 수업을 들은 뒤 30분 안에 랩을 써내야 한다. 정말 랩을 숙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하는 수행평가 같은 느낌도 든다. 래퍼들이 랩을 써내면 MC 김숙과 유재환은 이를 평가한다.

질문을 던져야 하지만 불온하진 않아야 한다

 윤병호의 반항은 <남줄랩>이 받아들이기에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어른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를 랩으로 풀어내는게 이 방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윤병호의 반항은 <남줄랩>이 받아들이기에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어른의 말을 듣고 깨달은 바를 랩으로 풀어내는게 이 방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EBS


방송을 보던 중에 흥미로운 장면을 포착했다. <고등래퍼> 시즌2에서 주목받았던 윤병호의 '반항'이 방송에서 다뤄지는 방식을 살펴보자. '내 나이 때의 부모님은 어떻게 살았을까 인터뷰를 하라'는 숙제가 주어졌는데, 윤병호는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부모의 예전 삶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며.

이 부분에 대해 김숙은 "나도 어릴 때 그랬다. 늘 내 멋에 살았다"고 말한다. 이는 표면상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라고 읽힐 수도 있다. 다른 10대 출연자들이 부모들의 20대 시절을 이야기하면 진지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윤병호의 말에는 공감 반응 없이 "그래 시대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니까"라는 말로 넘어가려는 모습은 특히 보기 좋지 않았다. 사실 이런 모습은 자칫 '폭력적인 꼰대질'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이것은 <남줄랩>만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다. 그냥 '랩 하는 청소년'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수준이 딱 이 정도라고 보면 된다. 청소년들의 발언권이 확대되고, 그들이 사회를 움직이는데 일정 정도 영향을 주는 최근 우리 사회에 '청소녀는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듯한 느낌은 주는 프로그램이 나온 건 많이 아쉽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1회에서 두각을 보인 윤병호는 3회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개인 사장일 수도 있으나, 명확한 건 그가 <남줄랩>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전혀 맞지 않은 캐릭터였다는 점이다. 10대들이 불온하진 않길 바라는 이 방송에서 과연 그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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