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만난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처럼 오래된 친구들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몇 년이 흐른 뒤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거나 어색한 사이가 됐더라도 예전 이야기를 하면 금방 풀어진다. <경환이>는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3명의 친구가 직장인이 된 후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우정에 대해 풀어낸 연극이다. 무대 위 배우들이 같은 대학을 나온 실제 친구들이라는 점이 극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어색한 친구 셋, 한자리에 모였고 사건은 터졌다

고등학교 시절 매일 붙어 다니던 덕주, 태호, 윤식은 잘나가는 친구 경환이의 부름으로 한 식당에 모인다. 정작 친구들을 불러낸 경환이는 보이지 않자 그들 사이 흐르는 어색한 기류. 하지만 이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술 한 잔씩 걸친다. 한마디씩 하며 티격태격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골프선수가 되라고 밀어붙이는 융통성 제로의 아버지를 피해 집을 나와 사는 태호, 장인의 눈치를 보며 처가살이하는 윤식, 회사 부장의 등쌀에 불면증약까지 먹고 있는 덕주 등 연극 <경환이>의 등장인물들은 특이한 듯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우정이라는 핵심적인 줄거리 안에 사회 이야기를 각 인물을 이용해 잘 녹여냈다.

그런 이들 앞에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인 세 명 모두 경환이에게 큰 돈을 투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경환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들은 함께 경환이를 찾아다니는 와중에도 무작정 나쁜 놈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연극 <경환이> 포스터 사진

연극 <경환이> 포스터 사진 ⓒ @theater_kyunghwan


학창시절과 우정의 상징 '경환이'

이들에게 경환이는 친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경환이는 나오지 않는 연극 <경환이>. 경환이는 고등학생이었던 이들에게도 직장인인 이들에게도 여전히 가장 믿을만한 친구다.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잘나가는 친구이고 학창시절에도 무슨 문제만 생기면 달려오는 해결사였다.

경환이는 이유 없이 그냥 좋은 친구, 믿음직한 친구, 형 같은 친구 등 우정에 대한 좋은 의미가 다 담긴 존재다.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물들과 경환이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나오는데 각 인물이 경환이와 일화를 회상할 때면 온갖 이상적인 모습만 나온다. 미화된 것일 수도 있고 이들의 말처럼 경환이가 그동안 철저하게 연기를 해온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경환이가 이들의 학창시절의 핵심인 것은 분명하다.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친구네 집과 친구의 어머니, 잘못된 일을 저질러도 믿어주던 친구에 대한 기억 등 그들 마음속 경환이의 존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의심하지 못한다. 경환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학창시절' '우정' 그 자체다.

쉴 새 없이 유쾌한 연극 <경환이>

연극 <경환이>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도 초점을 맞춘다. 30대 중반 남자들의 고민, 학창시절 잘못했던 기억 등의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 재치 있게 풀어낸 점이 눈에 띈다. 안 웃은 부분이 더 적을 정도인데 가볍지 않은 사건과 인물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친구들 간의 대화, 음악, 몸짓 등으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중 일등공신은 단연 '멀티' 역을 맡은 배우다. 멀티 역은 여학생, 경비원, 할아버지, 대리기사, 과장, 조폭 등 많은 배역을 소화하는데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등장하는 것만으로 관객의 기대감과 웃음을 터뜨릴 정도다. 특히 여대생으로 분장한 멀티 역의 배우가 오락실에서 점프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객석이 뒤집어졌다. 실제 오락실 같은 센스있는 배경음악을 이용해 실감 나는 장면이 만들었는데 김찬호 배우는 '여고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렵한 점프력을 과시해 큰 웃음을 줬다.

주요 내용을 다룬 직후나 직전에 이런 유쾌한 장면들을 배치했다.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에피소드 속에서 잠시 웃고 넘어가는 시간을 둬 다음 이야기의 집중도를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연극 <경환이>는 효과음과 배경음악, 조명을 많이 활용하는 점이 특징인데 그럴 때마다 배우들의 몸짓이 마치 안무같이 잘 어울린다. 특히 운전하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대사 대신 노래를 부른다면 뮤지컬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 몸짓과 유연함이 돋보인다. 적절한 음악과 조명 덕분에 지금처럼 재미있는 <경환이>가 탄생한 듯싶다.

유쾌해서 좋지만 다소 아쉬울 때도

 연극 <경환이>의 대리 운전 장면 연습실 현장이다.

연극 <경환이>의 대리 운전 장면 연습실 현장이다. ⓒ @theater_kyunghwan


다만 연극 <경환이> 특유의 유쾌함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진지한 이야기나 각 인물의 내면을 더 깊이 꺼내려는 찰나에 바로 신나는 음악으로 장면이 전화돼 깊이 다뤄지지 않는다. 인물들의 진짜 힘든 이야기나 우정이 박살 나는 순간을 더 깊고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싶어 아쉬울 때가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설정에 사회의 모습을 반영해 이를 표현하려는 의도는 있었으나 유쾌함과 재미에 더 초점을 맞췄다. 고등학생과 34살은 분명히 다르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들 개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만 할 게 아니라 34살의 우정을 더 풀어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연극 <경환이>는 4명의 우정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고등학생 때 만난 친구들이 34살 때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사라진 경환이와 벌어진 사건들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색한 사이가 돼버린 친구들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학창시절로 돌아가 다시 뭉친 느낌이다. 흐지부지 불확실한 결말도 처음에는 찜찜했지만 결과 보다 친구들의 만남에 중심을 둔 연극 <경환이>의 내용에 오히려 잘 맞는 마무리였다. 이 극을 보는 관객들이 스스로 친구들을 떠올리며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인 그날그날 조금씩 달라지는 감정들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하루하루 색다른 결말을 남기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박살 나든 굳건하든 우정은 우정

패기 넘치던 스무 살에 연극의 꿈을 가지고 만난 친구들. '꼭 같은 무대에 서보자'는 약속을 한 이들은 마침내 34살에 그 꿈을 이룬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데 주변의 많은 사람이 도움을 줬고 같이 꿈을 이룬 사람도 있다. 뮤지컬 배우 박혜나는 이들을 도와주다 본인의 꿈이었던 '연출'에도 첫 도전을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꿈도 많은 학창시절. <경환이>는 꿈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극 안에도 극 밖에도 있는 따뜻한 연극이다.

박살 나든 굳건하든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다들 머릿속으로 각자의 경환이를 떠올렸을 거다. 우리가 묻어뒀던, 잊고 있던 기억과 추억을 콕콕 찌르는 연극 <경환이>를 추천한다.

 연극 <경환이>의 김찬호, 지찬, 김동준, 김창회 배우들이 커튼콜을 하고 있다.

연극 <경환이>의 김찬호, 지찬, 김동준, 김창회 배우들이 커튼콜을 하고 있다. ⓒ 채효원



덧붙이는 글 연극 <경환이>는 3월 5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3관에서 공연한다.
연극경환이 김찬호 박혜나 지찬 경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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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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