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합> 포스터.

<궁합> 포스터.ⓒ 주피터필름


심은경·이승기 주연의 <궁합>은 조선 후기인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부마 간택 문제를 다룬 영화다. 극심한 가뭄으로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옹주(후궁의 딸)의 남편을 선발하는 이벤트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 선발 과정에서 궁합이 핵심 기준으로 작용한다. 공주와 상생 관계인 남자를 찾고 상극 관계인 남성을 배제하는 데 궁합이 사용된다.

하지만 옹주는 평생의 반려자를 그런 식으로 구할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최종 후보자들을 만나러 궐 밖으로 잠행한다. 완전한 자유 결혼은 아닐지라도 그렇게라도 자기의 의중을 반영하고 싶어 한다. 그러다 옹주가 궁합과 관계없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나가게 된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에서는 조선 왕실이 배우자를 구할 때 이씨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동성 결혼을 피하자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데 이씨만 피한 게 아니었다. 김씨도 경계 대상이었다. 왕비를 간택할 때는 특히 그랬다. 음력으로 선조 10년 5월 1일자(양력 1577년 5월 18일자) <선조수정실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 수정판이다.

"애초에 궁중에서는 초창기 임금들 때부터 '금(金)이 들어간 성(姓)은 목(木)이 들어간 성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여성을 뽑을 때는 항상 (김씨를) 배제했다."

우주를 구성하는 기(氣)의 성분인 오행(五行)은 목(木)·토(土)·수(水)·화(火)·금(金)의 성질로 구성돼 있다. 이들 오행 상호 간에는 상극(相剋) 관계가 존재한다. 木은 土를 극하고, 土는 水를 극하고, 水는 火를 극하고, 火는 金을 극하고, 金은 木을 극한다.

극(剋)은 '이기다, 극복하다' 등의 의미다. 나무(木)가 흙(土)을 뚫고 나오는 것, 흙더미가 물(水)의 흐름을 막는 것, 물이 불(火)을 끄는 것, 불이 쇠(金)를 녹이는 것, 쇠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 간의 상극 관계가 이해된다.

김씨 여성이 왕비가 되면 이씨 성인 임금을 해친다?

 오행 상호간의 상극 관계.

오행 상호간의 상극 관계.ⓒ 김종성


한국인들은 이상하게도 성씨를 가리킬 때만큼은 金을 김으로 읽는다. 금으로 읽든 김으로 읽든, 그 안에 '쇠'의 뜻이 담겨 있기는 마찬가지다. 조선 왕실 성씨는 이(李)다. 李 속엔 木이 들어가 있다. 오행 이론을 응용하다 보면, 김씨와 이씨 간에 전자가 후자를 극하는 관계가 도출된다.

그래서 김씨 여성이 왕비가 되면 이씨 남편인 임금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김씨의 경우에는 구체적 사주를 볼 것도 없이 성씨만으로 '임금과 궁합이 안 맞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김씨를 후궁으로는 몰라도 왕비로는 맞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됐다. 조선왕조는 일부일처제 국가였으므로 후궁은 법적으론 부인이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고위직 궁녀였다. 그래서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씨를 왕비에서 배제하는 조선왕조 전통은 선조시대 후반부인 1602년까지는 잘 지켜졌다. 제2대 주상인 정종의 왕비인 정안왕후가 김씨였지만, 정안왕후와 정종이 결혼한 시점은 정종이 왕이 되기 훨씬 전이었다. 정안왕후가 1355년 생이고 조선 건국 연도인 1392년에 37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결혼은 조선 건국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조가 세워진 뒤부터 1602년까지는 김씨가 왕비나 세자빈이 된 적이 없었던 셈이 된다.

이 원칙이 깨진 1602년에 선조는 32세 연하의 인목왕후(훗날의 인목대비) 김씨와 결혼했다. 선조한테는 김씨 후궁도 셋이나 됐다.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공빈(공빈 김씨), 인조의 할머니인 김인빈(인빈 김씨), 김순빈이 그들이다.

위의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선조가 세 명의 김씨 후궁을 들인 상태에서 인목왕후 김씨마저 들인 일로 인해 사람들이 불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 사후에 인목왕후는 폐위되고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김인빈의 손자인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김공빈의 아들인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일이 있었다.

금(金)이 들어간 성씨를 이씨 왕실이 경계했다는 사실은, 기록의 불확실 때문에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들이 金자를 놓고 쇠를 가리킬 때는 '금'으로 읽고 성씨를 가리킬 때는 '김'으로 읽는 이유의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김씨들이 이씨 왕실의 견제를 피하고자 자신들의 성씨가 쇠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성씨 자체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금속이나 쇠도끼가 연상되지 않는 쪽으로 金을 발음했을 수도 있다.

금(金)나라 역사서인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황제 김함보는 본래 신라인이었다. 청나라 정부에서 편찬한 만주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서도 그랬다. 신라인으로 살 적에 김함보의 이름은 김준(金俊)이었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의 예종 편(정식 표현은 '예종 세가')에서는 김함보가 금나라 시조가 된 사실을 설명하면서 그의 본래 이름이 금준(今俊)이었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뜻이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글자'를 서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金과 今의 발음이 같았기 때문에 김준을 금준으로 표기했을 수도 있다. <고려사>는 국가에서 편찬한 기록이라 신중한 교정 작업을 거쳤을 것이므로, 금준이 잘못 인쇄됐다는 확증이 나오지 않는 한 '고려 때만 해도 金씨를 금씨로 발음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선조수정실록>에 언급된 것처럼 조선왕조가 金이 들어간 성씨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화정>에서 인목대비로 분한 배우 신은정

드라마 <화정>에서 인목대비로 분한 배우 신은정ⓒ MBC


金을 피한 조선왕조, 金 때문에 곤란해지다

그렇다면, <고려사>가 김씨 성을 가진 여타 인물들은 金씨로 표기하면서, 김함보의 성만큼은 굳이 今씨로 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신라 출신 金씨가 동아시아 최강국 금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김씨들 사이에 '불온한 기운'이 퍼질지 몰라서, 조선 정부가 이걸 막고자 일부러 今으로 표기했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금융감독원 출신의 공직자로서 금조사(金朝史) 즉 금나라 역사를 연구한 윤명수의 <금조사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금시조(금나라 시조)와 관련하여 金俊을 今俊으로 서술한 것은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부활 견제 혹은 금시조 관련 사항의 은폐 등 다소 불순한 의도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12세기 초반에 여진족 금나라가 송나라(북송)를 제압하고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자, 고려 내에서는 '우리도 여진족처럼 대륙으로 진출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를 활용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이런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윤명수의 추정처럼 조선왕조가 금나라와 金씨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음양오행 원리에 입각해 金씨를 경계한 조선왕조. 이 왕조의 멸망 과정에는 실제로도 금이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19세기 후반에 세계 경제는 최강국인 영국을 필두도 금본위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금을 기준으로 자국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는 제도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도 1897년에 금본위제로 전환됐다. 그 전만 해도 세계 경제는 기본적으로 은본위제로 작동했다.

 19세기 후반에 발행된 노르웨이 금화.

19세기 후반에 발행된 노르웨이 금화.ⓒ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일본이 금본위제로 진입하기 훨씬 전부터 조선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1876년 일본에 시장을 개방한 뒤에, 조선산 금이 일본으로 끊임없이 유출된 것이다. 1885년부터 기록된 조선 해관(海關, 세관)의 통계자료에는 금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고 있다는 경고성 글이 실려 있다. 이 자료는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 한동안 청나라가 조선 해관을 대신 관리했기 때문에 조선 해관 사료가 <중국 구해관 사료>에 실린 것이다.

일본인들이 조선 금을 반출한 것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다가올 금본위제 시대에 대비해 금을 충분히 확보해두려고 그랬던 것이다. 민두기 전 서울대 교수의 <일본의 역사>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조선의 금과 쌀을 필요로 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이 금본위제를 실시할 때, '장차의 금 준비 공급의 가망'으로서 일본 내 생산고 2백관에 더하여 조선에서 5백~7백관의 수입을 작정하고 있었다."

일본이 금본위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국산 금보다 조선산 금을 더 많이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금본위제 실시를 도와준 또 다른 요인이 있다. 1894년부터 이듬해까지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건이다. 미국인 경제학자들인 론도 캐머런과 래리 닐은 <간결한 세계 경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1895년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낸 일본은 1897년에 그 수입금으로 일본은행의 금 준비를 마련하고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렇게, 조선산 금과 청나라 배상금에 힘입어 일본은 금본위제에 신속히 적응했고 이것은 일본이 세계적 강국으로 우뚝서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중국을 괴롭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선에서 빠져나간 금이 일본을 강화하고 조선을 약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金을 무척이나 경계했다. 그래서 왕비 후보자와 왕의 궁합을 볼 때도 김씨 여성만큼은 무조건 배제했다. 이런 조선 왕조가 막판에 금 유출을 막지 못해 일본의 부국강병을 돕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망하게 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말처럼, 조선왕조와 금의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결과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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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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