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좇다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는 이야기는 흔하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그렇다. 파우스트는 세상 모든 지혜를 가진 학자였지만, 채워지지 않은 욕망에 스스로 목숨까지 버릴 만큼 괴로워하다 끝내 악마의 덫에 걸려들고 만다. JTBC 드라마 < 미스티(misty) >는 어딘가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미스티>

미스티 JTBC 드라마 <미스티>

▲ 미스티 JTBC 드라마 <미스티> ⓒ 글앤그림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앵커 고혜란(김남주 분)은 파우스트를 닮았다. 똑똑한 머리와 빼어난 말솜씨, 여기에 눈길을 사로잡는 외모까지. 게다가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법조인 가문의 검사였다. 저녁이면 사람들은 고혜란 앵커 앞에 모여앉아 그가 들려주는 세상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은 고혜란을 믿는다.

그러나 카메라 밖 고혜란은 다르다. 만인이 우러르는 고혜란이지만 정작 그의 곁엔 아무도 없다. 부모도, 남편도, 친구도. 그래서 그는 벌써 7년째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남편 강태욱(지진희 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답답하고, 10년 전 헤어진 옛 연인 이재영(고준 분)을 잊지 못해 괴롭다.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남편의 부모는 이젠 당장 아이를 낳으라며 달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약을 내민다.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힘겹다.

"더럽게 힘드네, 사는 거."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엔 끝 모를 욕망이 꿈틀댄다.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시절 검사 강태욱이 묻는다.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냐고.

"내가 올라갈 수 있을 데까지. 최고로 높이."

술김에 그냥 뱉은 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아주 높은 곳엘 오르고 싶다. 멀찍이서 권력을 지켜보는 자리가 아니라, 그 권력의 곁을 지키는 자리, 아니 어쩌면 바로 그 권력의 자리에 말이다. 그런 그가 앵커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밀려날 처지에 몰렸을 때, 거짓말처럼 '메피스토펠레스'(악마)가 나타난다. 하필 그때, 그것도 오래 전 그에게 차갑게 버려졌다 만인이 사랑하는 멋진 골프 선수로 돌아온 옛 연인 이재영이.

그에겐 다른 길이 없다. 이대로 내려가거나 돌아가는 길 뿐. 그는 어렵게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아가 손을 내민다. 그리고 다시 더 높은 곳에 오를 기회를 되찾았지만, 삶은 오히려 더 위태롭다.

며칠 뒤 이재영이 죽는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골프 선수 케빈 리가. 그리고 고혜란을 조사실로 불러들인 형사 강기준(안내상 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누가 고혜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아마도 고혜란은 억울할 것이다. 그가 맞닥뜨리는 이 모든 현실이.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시달렸고 아마도 무척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무언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도 가졌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기댈 곳 없는 외롭고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기자가 된 뒤론 '꼴통' 소리를 들을 만큼 독하게 현장을 뛰었다. "곧 정치부장 달고 9시 뉴스 앵커가 될 거"라던 그의 말처럼 그는 아직 선배들도 앉아보지 못했던 저녁 뉴스 앵커 자리를 꿰찼다.

이쯤 되면 박수를 받을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여자였다.

"고혜란이가 원래 그런 걸로 유명했지. 줄 거 있으면 쌔끈하게 주고..."

그에게 밀린 이들은 엉뚱한 데서 이유를 찾았다. 이유라기보단 차라리 뒤에 숨을 핑계거리에 가까운 것들. 자기 힘으론 도저히 못 당하겠으니 다른 이를 끌어들여 싸움을 붙이기도 한다.

"고혜란이랑은 해상도부터가 다르다."

그럴 듯한 명분을 대지만 분풀이에 다름 아니다. 오대웅(이성욱 분) 팀장은 고혜란을 밀어낼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누구라도 앉힐 작정이다.

아마도 남자였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이자, 폭력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남자였다면 겨우 삼십대 중반에, 내세울 거라곤 그저 더 젊다는 것 하나뿐인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그 나이에 추하게 욕심 부리지 말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말이다. 또 뱃속의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배란일마다 들이닥치는 시어머니 앞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혜란이 무척이나 가엽다.

고혜란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미스티 JTBC 드라마 <미스티>

▲ 미스티 JTBC 드라마 <미스티> ⓒ 글앤그림


한 달 전으로 거슬러갔던 이야기는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사이 이재영은 죽었고, 경찰서에 불려와 참고인 조사를 마친 고혜란은 그를 물어뜯으려 이빨을 드러낸 채 기다리는 기자들 무리와 맞닥뜨려야 한다. 어쩌면 그를 믿었던 세상 사람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릴지 모른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죽은 이재영 말고도 메피스토펠레스는 더 있다. 고혜란이 되고픈 그를 꼭 닮은 후배 기자 한지원(진기주 분)도, 옛 연인의 아내이자 그를 속속들이 아는 고교 단짝 서은주(전혜진 분)도, 또 닳을 대로 닳은 기자인 윤송이(김수진 분)와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기억 속 남자 하명우(임태경 분)도 저마다 고혜란의 가슴 속 욕망을 헤집으며 독이 든 술잔을 건네려 할 것이다. 한 번의 그릇된 선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점점 더 깊은 파멸로 이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고혜란의 곁엔 강태욱뿐이다. 그가 왜 고혜란에게 돌아 왔는지, 또 언제까지 곁에 남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죽음에 이른 파우스트를 악마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 구원에 이르게 한 건, 파우스트를 사랑하다 안타깝게 죽어간 여인 마르가레테였다. 한때 고혜란을 뜨겁게 사랑했고, 지금 다시 먼 길을 돌아 그의 곁을 지키는 강태욱을 보면 마르가레테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이란 노력하는 한에는 헤매기 마련이니라."

괴테가 <파우스트>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고혜란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미스티 김남주 지진희 MI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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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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