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교양 프로그램 <다큐프라임>에서는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을 방송했다.

EBS 교양 프로그램 <다큐프라임>에서는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을 방송했다.ⓒ EBS


[기사 수정: 9일 오후 4시 55분]

'결정론'을 피하고 싶지만, 한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운명적이다. 특히나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세계 최강국을 자처하는 미국과 신흥강국 중국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운명은 더욱 그렇다. 게다가 한 민족이지만 '동상이몽'을 꾸는 북한, 남보다 못한 이웃 일본까지 있으니 외적 동인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교육을 통해 배워온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은 현실보다 '민족적 대의'에 맞춰 편제된 역사였다. 몽고에 대항한 고려의 대응은 '삼별초의 결사 항전'이었고, 조선 말기에 겪은 외세의 침탈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등이 그 예다.

지난 1월 29일부터 5부작으로 방영된 EBS 교양 프로그램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편은 기존의 역사의식에서 한 발 비껴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 하는 내용이었다.

투키기데스의 함정에 빠진 한국

방송에서는 현재 외교적 위기에 봉착한 한반도 정세를 통해 '현실주의적 역사학'의 필요성을 짚었다.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기존 패권 국가와 신흥 강대국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미국과 점점 자국의 패권을 확장시키고 있는 중국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러시아, 일본 사이에 낀 대한민국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용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우리 역사에서도 그리 생소한 상황이 아니다. 일찍이 삼국 시대 이래 한반도는 늘 위기와 선택의 함정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 당나라와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던 고구려, 일본까지 영향력을 뻗친 백제 사이에 낀 신라의 운명이 그러했다. 또 남하 정책을 벌이며 성장한 거란과 국경선을 맞닿은 고려도 그랬다. 폭풍 성장하는 강국 몽골을 상대한 후기의 고려 또한 그러했다. 명-청 교체기에 갈피를 잡지 못한 병자호란 시기의 조선도 다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한반도를 판으로 이권 쟁투를 벌였던 개화기의 조선은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다큐프라임>은 바로 이런 위기의 한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날 우리 외교가 배울 교훈을 찾고자 한다. 그 첫 장을 연 건 김춘추의 신라였다. 642년 백제의 대야성 공격과 내부 정치의 혼란으로 신라는 위기에 빠졌다. 당시 김춘추는 그 위기를 고구려와의 외교적 연대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의 적국이었던 고구려로 솔선수범해 찾아갔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김춘추는 억류되었다가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채 도망친다.

<다큐프라임>은 국가적 위기에 빠졌을 때 지도자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선 점을 높이 평가한다. 고구려에서 실패한 김춘추는 당시 고전하고 있던 당나라를 차선의 해결책으로 택한다. 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육전으로 고전했던 당나라는 이에 적극적으로 신라와 제휴를 맺는다. 당나라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정벌까지 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견인한다.

방송에서는 가만히 있었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국가적 존망이 위태로웠을 신라가 그 위기를 역으로 활용해 현실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친 것을 높이 산다. 실리를 택해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 회 신라의 사례를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지정학적 위치 상 열강 사이에서 고립되기 쉬운 한반도는 실리적 외교 정책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국력이라는 것.

실리적 외교와 자강,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라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서희의 실리적인 외교담판에 주목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서희의 실리적인 외교담판에 주목했다.ⓒ EBS


대표적인 사례는 이미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서희의 외교담판이다. 하지만 고려가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었던 건 아니다. 당시 남하 정책을 펼치고 있던 거란이 고려와의 유대를 위해 사신을 보냈을 때, 고려는 발해를 패망시켰던 거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거란에서 온 사신이 선물한 낙타를 죽였다. 그 결과는 거란의 침공이었다. 남하 정책에 발목이 잡힌 거란의 속내를 읽은 서희는 오히려 강동 6주을 얻는 혁혁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명분보다 실리을 앞세운 전형적인 외교전의 승리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이후다. 고려는 외교전에서 얻은 강동 6주를 포함한 압록강 국경선을 구축하고 탄탄히 대비했다. 20년 뒤 다시 거란의 침공이 있었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듯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통해 고려가 승리를 거머쥔다. <다큐프라임>은 당시 고려 현종이 수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앞서 나아가 방어선을 쌓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방어선'은 '강화도 천도' 그리고 남한산성에 고립됐던 병자호란 때와 대비된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려 했으나 그조차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피난처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남한산성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를 포기하지 않고 앞서 나아가 방어선을 쌓는 것과 강화도 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몽골이 침략한 와중에 군대가 자신들처럼 쿠데타를 일으킬까 두려웠던 무신 정권은 1231년 제1차 몽골 침략을 물리친 뒤인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수운을 이용해 세금을 걷었고 그 덕택에 왕과 귀족들은 평화로웠지만 국토는 몽골에게 유린당했다. 지도자의 자세부터 달랐던 셈이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에도 앞서 방어선을 치면 설사 패배하더라도 온 나라가 짓밟히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고려의 무신 정권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도 백성의 안위는 염두에 없었다. <다큐프라임>은 바로 그 지점에서 리더의 자세를 논한다.

방송은 일제강점기 '헤이그 밀사' 역시 재해석했다. 고종이 한 국가의 대표로서 나라를 지키기보다 외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왕권'을 보존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큐프라임>은 이것이 고종의 이해타산적 외교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외교적 '균형자'도 자국의 국력이 기반되어야 가능하다는 당연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힘을 빌려, 그게 안 되면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 또 미국에 읍소하고 유럽 열강에 기대려 했던 고종에게 '망국'은 예정된 결과라고 다큐는 지적한다.

세계 석학과 국내 유수 역사학자들은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인 한국이 만약 한반도가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 혹은 다른 아시아 지역에 있었더라면 지역 패권을 누렸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큐프라임>은 '오천년 한국사'의 사례를 냉철하게 재해석하며,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외교적 관점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 외교 정책에 '자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다큐프라임>에서 보여준 한국사 해석은, 이른바 '국뽕'을 배제한 한국사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사일지도 모르겠다. 새롭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래서 더욱 새롭게 느껴졌던 역사 이야기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를 무시했던 조선을 반면교사 삼아, 오늘날 우리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돌아봐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더욱 가치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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