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 이형택을 넘어 한국 테니스의 새 역사를 썼다.

세계랭킹 58위에 올라 있는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은 지난 22일 호주 멜버른의 멜버른파크 로드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2018년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전 세계랭킹 1위 조박 노코비치(세르비아)를 세트스코어 3-0(7-6, 7-5, 7-6)으로 제압하고 8강에 진출했다. 이로써 정현은 한국 선수로는 역대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 오픈)에서 8강에 오른 선수가 됐다.

하지만 호주오픈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한 주요 해외 언론들에서는 정현의 '역사적인 승리'보다는 조코비치가 당한 패배를 더욱 비중 있게 다뤘다. 한국 테니스 팬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하게 느껴질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내 팬들은 이런 분위기를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코비치라는 위대한 선수가 세계랭킹 50위권의 동양 선수에게 패한 것은 그만큼 세계 테니스계에서 '커다란 이변'이기 때문이다.

2010년대 남자 테니스계의 양강구도 무너트린 '무결점 테크니션'

 세계 테니스 패들에게는 정현의 승리보다 조코비치의 패배가 더욱 큰 뉴스였다.

세계 테니스 패들에게는 정현의 승리보다 조코비치의 패배가 더욱 큰 뉴스였다. ⓒ 호주오픈 홈페이지 화면캡처


세계 테니스는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왼손천재'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2000년대 중반부터 오랜 기간 각종 대회의 우승을 주고 받으며 양강 체제를 유지해왔다. 조코비치는 영원할 것 같았던 양강구도를 무너트리고 2010년대부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정상에 등극한 선수다. 여기에 '영국의 자존심' 앤디 머레이까지 합류(?)하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세계 남자 테니스의 '빅4'가 완성된다.

2008년 호주오픈에서 세르비아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을 차지할 때만 해도 조코비치는 그저 '돌풍을 몰고 온 신예'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 완벽히 각성한 조코비치는 그해 프랑스오픈을 제외한 모든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코비치가 페더러와 나달을 넘어 커리어 최초로 세계랭킹1위에 등극했던 해이기도 하다.

조코비치는 시속 200km 이상의 강서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도 아니고 나달처럼 코트 전체를 마구 휘젓는 무한한 강철 체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테니스의 황제로 군림한 페더러에게서 풍기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그 어떤 부분에서도 단점을 찾기가 힘든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친다. 국내외 언론에서 조코비치를 '무결점 테크니션'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코비치는 2011년을 기점으로 정상급 선수로 성장해 2016년까지 세계랭킹 1위를 오가며 꾸준히 정상의 자리에서 군림했다. 특히 2011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메이저대회 3관왕을 차지한 2015년에는 1년 동안 82승 6패 승률 93.2%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조코비치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그리고 이어진 리우 올림픽에선 1회전에서 탈락하는 '인간미'까지 선보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조코비치는 2017년 호주오픈 2회전 탈락,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에서는 각각 8강에서 탈락하며 체면을 구겼다. 2016년부터 조코비치를 괴롭히던 팔꿈치 부상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결국 조코비치는 U.S 오픈을 비롯한 후반기 투어 참가를 포기하고 남은 시즌 동안 재활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구기 종목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시즌아웃'을 선언한 것이다.

불편한 팔꿈치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조코비치의 위엄

부상으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조코비치의 세계랭킹은 14위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테니스팬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조코비치가 부상에서 돌아와 정상적인 기량을 발휘해 준다면 다시 랭킹을 끌어 올리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팬들은 조코비치가 통산 6회 우승 경험을 자랑하는 호주오픈을 통해 복귀전을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를 키웠다.

세계랭킹에 따라 14번 시드를 받은 조코비치는 도날드 영(미국)과 가엘 몽피스(프랑스), 알버트 라노스 비놀라스(스페인)를 차례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세 경기의 세트스코어는 9-1. 그야말로 무결점 테크니션의 화려한 귀환을 알리는 듯했다. 반면에 조코비치의 16강 상대 정현은 32강에서 세계랭킹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나 체력 소모로 보나 16강은 조코비치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경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됐다. 정현이 경쾌한 움직임을 앞세워 조코비치를 질리게 만들며 경기를 유리하게 전개해 나간 데 비해 조코비치는 전성기 때라면 좀처럼 나오지 않았을 잔실수가 유난히 많았다. 조코비치는 팔꿈치를 움직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함을 호소했고 정현을 상대로 최상의 경기를 펼칠 수 없었다. 결국 조코비치는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정현에게 완패를 당했다.

정현이 2007년의 이형택을 넘어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대회 8강에 오른 것과 달리 조코비치는 2007년 이후 처음으로 호주오픈에서 0-3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완벽하지 않은 컨디션 속에서도 두 번이나 타이브레이크 세트를 만들며 전 세계 랭킹 1위의 위용을 과시했다. 조코비치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자신을 꺾은 정현을 격려하고 자신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마지막까지 좋은 매너를 유지했다.

2017년 호주오픈 16강에서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었다는 사실은 세계 테니스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겠지만 그렇다고 정현이 조코비치를 뛰어넘는 선수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조코비치는 여전히 세계 테니스 역사에서 많은 것을 이룬 살아있는 전설이자 정현에게 많은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좋은 롤모델이다. 그리고 자신의 우상을 꺾어 자신감에 가득 찬 만 21세의 젊은 청년은 아직 호주오픈에서 더 보여줄 것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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