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빙 빈센트>의 포스터. 고흐가 남긴 회화의 풍경과 인물을 애니메이션의 배경과 인물로 활용한 작품으로, 고흐가 보여 준 예술가의 숙명이 깊은 감동을 준다.

영화 <러빙 빈센트>의 포스터. 고흐가 남긴 회화의 풍경과 인물을 애니메이션의 배경과 인물로 활용한 작품으로, 고흐가 보여 준 예술가의 숙명이 깊은 감동을 준다. ⓒ 판씨네마(주)


우리는 잘 알려진 것들을 사랑한다.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나, 늘 먹던 식당의 메뉴까지도 그렇다. 만약 미술에 생전 관심이 없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면 다들 이렇게 답할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그렇다면 나는 그 대답에 이어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당신은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귀 한쪽이 잘린 남루한 초상에서부터 책상 위에 놓인 해바라기 한 다발,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까지. 분명 그는 너무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그린 화가 본인에게는 그 유명세가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귀를 한쪽 잘라낸 '광기의 천재'쯤으로 기억하고 관심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러빙 빈센트>(2017)는 그 광기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아주 조심스레, 서서히 중앙으로 향한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쏟아지는 소문들 사이에서, 그 어떠한 것도 사실이 되지 못한다. 단지 그 중앙에 남은 고흐의 죽음만이 확실할 뿐이며, 우리가 그것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는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고자 한다. 바로 이 남자를 통해서 말이다.

고흐가 죽고 일년 뒤, 고흐가 보내지 못한 편지를 전해주려는 한 남자가 있다. '아르망 룰렝(더글라스 부스)'은 그 과정에서 고흐에 관한 여러 야사를 듣는다. 친밀함의 정도와 무관하게, 고흐를 알던 그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고흐의 초상을 전한다. 무례한 한량, 친절한 이웃, 미치광이, 천재.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이 되지 못한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룰렝과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지, 그 사이에 제기된 일련의 의문을 되새겨볼 뿐이다. 고흐의 자살을 둘러싼 작은 소동, 혹자는 타살이라 칭하고 대부분은 자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의혹의 나선이 아닌, 그것을 따라가는 시선이다.

애도의 과정

 영화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영화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죽음을 따라가는 시선이라고 한다면 단언컨대 애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애도라는 것은 망자가 걸어온 길을 다시금 걸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살아가며 마주하는 많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곤 한다. 검은 옷과 소소한 조의금을 품고 장례식으로 향한다. 망자를 알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그곳에 많은 족적이 남겨져 있고, 그것을 거꾸로 따라가면 여러 방향의 시선이 생겨난다. 그 시선은 누군가의 발자취와 섞여 난잡해지기도 하고,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기도 하다.

이제 그 형체에 대해 말해볼 때가 왔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1917)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도는 사랑하던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에 실패해 대상이 내면에 머무르다 보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결핍이 자신의 것이 되어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 영화 속 주변인들의 족적은 그것이다. 추모를 위해 왔던 장소에서, 쉬이 떠나지 못해 겹쳐지는 발자국들이 바로 '우울증'의 증표다.

그 애도의 시선으로 영화를 다시 보자 신묘한 일이 일어난다. 일단 그 신묘함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로, 아르망 룰렝은 고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발자취를 좇는다. 이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 두 번째로, 룰렝은 단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편지를 전해주는 것뿐인데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가 고흐를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

우리는 고흐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영화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영화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 판씨네마(주)


그렇다, 영화가 고흐에 대해 다루지만 고흐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르다. 고흐의 삶을 그려내니 전기 영화라고 칭할 수 있겠지만, 그 어느 것과는 달리 사후를 다룬다. 왜 하필 사후냐고 묻는다면, '러빙(Loving) 빈센트'이기 때문이리라. 생전의 평판이 어떠했든 간에,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섰던 그의 발길이 멈춘 곳은 우리의 기억 속이다. 여기서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금 던져본다. 우리는 고흐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적어도 영화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알 것 같다. 고흐가 남긴 발자취인 유화라는 것을 영화의 매체로 선택함으로써, 영화는 고흐의 삶을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 된다.

우리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신이 평소 고흐의 팬이 아니었더라면) 그렇다면 왜 우리는 룰렝처럼 고흐를 두둔하게 될까? 단지 그의 불행한 삶에 동정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건, 고흐가 우리의 마음에 영원한 별로 존재(La being)하기 때문일 듯하다. 우리가 고흐를 애도하며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악한 것으로 바꾸고 싶지 않기에 그렇다. 우리가 그를 애도하는 마음이, 우리를 공격해 우울증으로 바뀌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인 것이다.

이제야 말하는 신묘한 일이란 이것이다. 우리는 그를 추모하는 거대한 기억 속을 걷고 있다는 사실, 이곳에선 사랑과 애도가 별반 다름없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룰렝과 마주하는 고흐의 주변인들이 그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고흐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룰렝은 그 표명 사이를 걸으며 이리저리 휘둘린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혹은 그 마음이 정말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고흐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고흐에 대한 아픔을 떨쳐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품어둔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 고흐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본다면 고흐의 주변인들도 우울증에 해당한다. 영화 속의 가셰 박사도 그렇게 묻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고흐가 미친 것이 맞는지, 그를 잣대로 판단하려는 우리가 미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그 증표를 따라가며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시민 케인>(1941)과 <라쇼몽>(1950)에서 보았던 베일, <시민 케인>의 톰슨 기자가 그러했듯 유명했던 누군가의 뒤를 쫓고, <라쇼몽>의 타죠마루처럼 여러 방향으로 미화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얇은 천 쪼가리를 들어내는 간단한 일임에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여태껏 고흐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패한 애도였음을 뒤늦게 깨닫은 건 아닐까.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사랑(Loving)하거나 삶(La being)이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중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그만큼 삶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연인이든 우정이든 은인이든 간에, 살아가며 만나는 모두를 껴안을 수는 없지만, 개중에 누군가를 조금은 더 사모할 수 있다. <러빙 빈센트>(2017)는 그 조그마한 사랑의 여백에 남기는 작은 찬사와도 같은 영화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적이며 영화적인, 고흐에 대한 짝사랑 편지다.

 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컷

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컷 ⓒ 판씨네마(주)



영화 러빙 빈센트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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