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속 프랭크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 분)는 꽤나 복잡다단한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욕망이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성격뿐만이 아니다. 대학 시절 그는 남성 '절친'과 애틋한 사랑을 나눈 인물이었다. 부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클레어(로빈 라이트 분)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질투를 느낀다.

앞서 이 괴물 같은 부부는 이들을 따르던 경호원과 셋이서 은밀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들의 '정치적 욕망'을 인간적 욕망과 지위에서 오는 권력 관계로 해석해낸 충격적이면서도 탁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괴물' 정치인을 연기해 전 세계인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케빈 스페이시가 스캔들에 휘말렸다. 마치 캐릭터를 창조해낸 예술인의 일면이 그 캐릭터에 투영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사건이라 할 만 하다. 덩달아 <하우스 오브 카드>까지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 <스타트랙: 디스커버리>에 출연 중인 배우 앤서니 랩은 지난 10월 29일(현지 시각) 인터넷 매체 버즈피드와의 인터뷰에서 "1986년 케빈 스페이시가 14살이던 나를 성추행 하려고 했다"고 폭로했다. 앤서니 랩은 당시 두 사람이 뮤지컬에 함께 출연했고, 케빈 스페이시가 자신을 집으로 초대해 성희롱을 했다고 주장했다.

케빈 스페이스는 즉각 트위터를 통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부적절한 행동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장문의 사과글을 게재했다. 문제는 케빈 스페이시가 사과문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 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미국 <게이 타임스>의 조지 리버스 편집장을 필두로 소셜미디어 상에서는 케빈 스페이시의 '커밍 아웃' 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도드라지고 있다. 자신의 성추행 논란을 커밍아웃으로 접으려는 것 아니냐는 소위 '물타기'란 지적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란을 의식한 듯 <하우스 오브 카드>의 제작사 넷플릭스는 최근 시즌6의 무기한 제작 중단을 선언했다. 그에 앞서 시리즈 자체도 시즌6으로 끝맺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드라마의 제작자이기도 한 케빈 스페이시의 성추행 논란이 드라마 자체를 종결시킨 희대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헌데, 짚어볼 만한 지점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할리우드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추행 논란과 이와 관련된 일련의 대응들은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파만파 웨인스타인 성추문 파문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이 지난해 9월 미 뉴욕주 헴스테드의 호프스트라대학에서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이 지난해 9월 미 뉴욕주 헴스테드의 호프스트라대학에서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영화 <설국열차>의 북미 배급을 맡았던 웨인스타인 컴퍼니는 소위 '가위질'로 '악명'을 떨쳤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파문이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벌써 한 달째다. 지난 10월 5일(현지 시각) 하비 웨인스타인이 1990년대부터 다수의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을 공공연하게 성추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후 웨인스타인이 이를 시인했고, 웨인스타인 컴퍼니에서 퇴출됐다. 미국 아카데미 위원회에서도 제명됐다. 이후 피해자들의 후속 폭로가 이어졌고 웨인스타인의 비위를 알고 있었다는 증언과 고백도 속출하고 있다.

그 피해자들의 숫자와 범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범위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자만 90여 명에 달한다. 특히 웨인스타인이 제작사이자 배급사 미라맥스를 키워냈던 1990년대, 당시 유명 여성 배우들 여럿이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웨인스타인의 성추행 이후 자신의 경력에 치명타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웨인스타인이 권력 관계를 이용해 이를 무마하려고 했거나 이를 묵인시키는 과정에서 강압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웨인스타인은 여성 배우들은 물론 201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배우 지망생, 모델, 회사 직원 등을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성추행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웨인스타인과 가까웠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배우 맷 데이먼, 벤 애플렉 등이 도마에 오른 것은 당연지사다. 웨인스타인이 할리우드의 유명인사이자 권력자였던 만큼 그의 광범위한 '손길'이 어디까지 뻗쳤고, 또 그의 권력 행사를 눈감아준 이들은 누구였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더스틴 호프만까지... '주홍글씨'는 남성들의 몫

 더스틴 호프만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는 AP 뉴스 갈무리.

더스틴 호프만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는 AP 뉴스 갈무리. ⓒ AP


'웨인스타인 효과'라고 해야 할까.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여성들에게 가해진 유무형의, 직·간접적인 폭력들에 대한 폭로와 토로가 이어지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제작 중단을 선언한 넷플릭스의 발 빠른 대응은 주목할 만 하다.

웨인스타인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할리우드에서는 과거 전력이 폭로된 인사들이 제작하고 배급한 영화를 '보이콧'해야 하는지, 또 그러한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팬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엇비슷하다. 과연 제작자이자 배우인 케빈 스페이시의 과거 전력과 작품 자체를 별개로 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논란과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넷플릭스의 대응은 비록 작품(시즌5 이후 작품 자체가 느슨해졌다는 평과와는 별개로) 자체가 입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제작사로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입장을 표명한 것에 가깝다고 할 만 하다.   

"저는 여러분과 다르지 않다. 그 일은 사회 어디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는 판을 바꿀 때다. 주홍글씨는 우리에게 찍을 게 아니라 그들(할리우드 96%를 차지하는 남자 감독들을 포함한 남성들)에게 찍혀야 한다. 이제 우리가 싸울 때다."

1997년 웨인스타인에게 강간 당한 뒤 비밀유지 조건으로 합의하고 침묵해야 했던 배우 로즈 맥고완. 그는 최근 한 공개석상에 참가해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 어디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로즈 맥고완의 목소리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위계에 의한 폭력이란 구조는 국적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96%가 남성 감독인 할리우드라는 전 세계 1위 영화 산업에서 벌어진 성추문 사건은 이미 한국 영화계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

김기덕 감독은 폭행과 강요 혐의 등으로 여배우 A씨에게 고소 당해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고, 2심에서 유죄가 확정된 '남배우A 사건'은 감독까지 진실공방에서 나서며 사회적인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중이다. 그에 앞서 여성 영화인들과 이에 동참하는 여러 영화인들은 영화계 내 성폭력 차별 구조를 개선하려는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웨인스타인 효과'는 이렇게 권력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이를 포함해 위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것이란 기대감도 높이는 중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혁명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배역의 비중부터 출연료, 현장 내 위계까지 여성 영화인들이 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 '무게'를 한 순간에 없애기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성추행과 같이 여성에게 행하는 물리적 폭력이 일순간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남성들의 무의식에 장착시키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위계에서 우위를 쥔 남성들이 먼저 각성하고 바뀌어야만 실질적인 '현장'의 변화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일 더스틴 호프만은 1985년 자신이 한 성추행에 대해 사과했다. TV 드라마 <세일즈맨의 죽음> 촬영장에서 17살이었던 여성 인턴 작가를 성희롱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 또 할리우드 감독 제임스 토백은 최근 성추행과 성폭행 혐의로 38명에 이르는 여성들로부터 고소 당했다. 브렛 래트너 감독 등 또다른 가해자들에 대한 폭로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이런 사회적 파장은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 캠페인인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영국 의회 직원들은 전·현직 각료 21명이 포함된 이른바 '성희롱 블랙리스트'를 작성, 발표해 영국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영국 마이클 팰런 국방장관은 15년 전 성추문이 밝혀지면서 전격 사임했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성추문 파문이 미국 영화계를 넘어 전 세계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는 형국이다. '웨인스타인 효과'에 이은 연쇄적인 성추문 사건이 그저 일회성 파문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주홍글씨'가 더 이상 여성들의 몫이어서는 안 되기에.

웨인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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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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