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뷰티인사이드> 메인포스터

▲ <뷰티인사이드> 메인포스터 ⓒ NEW엔터테인먼트


01.

충무로에서 멜로/로맨스물을 하지 않고서는 한 해를 버틸 수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던 시기도 다 옛날 이야기. 지금의 한국 영화계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감성을 건드려 줄 법한 작품이 없는 것 같다. 최근을 따져봐도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을까? 장르적 트렌드는 시대에 따라 돌고 돈다고 하지만 이처럼 어느 한 장르를 기피했던 시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멜로/로맨스물과 함께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호러 장르만 해도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는데.

물론 한국 영화의 멜로 계보를 이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손예진, 장진영, 이은주 등의 여배우가 즐비했던 한 세대가 허망하게 자취를 감춘 뒤로, 타이틀 롤(Title Role)을 맡길 만한 여배우들이 등장하지 못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지금 그 아래로 김새론, 김향기, 고아성, 김유정 등의 아역 출신의 배우들이 꽤나 성실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으니 이들의 성숙함이 꽃 피우게 될 때쯤에는 멜로/로맨스의 시대 역시 다시 한번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02.

그런 와중에 그동안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업으로 삼아 온 백감독(본명 백종렬, 이하 백감독)이 동명의 인텔&도시바 제품 광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 <뷰티 인사이드>를 연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영화판에 뛰어들었다는 소식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남자 주인공으로 무려 21명의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야기에는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길어봐야 14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21명의 배우라니. 10명 남짓의 메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도둑들>(2012)이나 <군도>(2014)와 같은 작품도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거나 분량의 무게감을 조절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21명이라는 숫자는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 많은 배우들이 남자 주인공 한 명을 연기한다고 하니 더욱더. 한효주로 알려져 있는 상대역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솔직히 한효주라는 배우가 연기력으로 조명 받아 온 배우는 아니지 않나. 여러 가지로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못했던 작품이 이 영화 <뷰티 인사이드>였다.

03.

감독의 확실한 성향 때문인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영화 분위기들과 다소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질적이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영화 자체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어야 겠다. 여타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각 시퀀스, 각각의 영상들이 마치 한 편의 광고 영상을 보는 것처럼 세련된 면이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인트로 지점의 오프닝 시퀀스는 최근에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명의 우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도록 보여줌으로써 그의 얼굴이 매일 아침 바뀐다는 설정을 사전에 제시한 것. 이 장면은 앞으로 보여질 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잡아줌과 동시에 작품의 내러티브가 나아갈 방향과 어느 정도의 복선 역할을 하는 기능적인 역할 역시 제대로 해냈다.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는 매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는 매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어하는 모습도 보인다. ⓒ NEW엔터테인먼트


04.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속도감에 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고 느리다는 개념의 절대적 속도에 대한 속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소요소에서 뛰어난 완급조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앞서 이야기 한 오프닝 시퀀스와 같은 장면은 그 많은 인물을 순식간에 흘려내면서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정 장면들 - 이수(한효주 역)가 우진(유연석 외 역)의 비밀을 알게 되는 장면, 우진이 청혼을 하던 자동차 시퀀스 - 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배우들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을 준다. 물론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기-승-전-결의 구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편차가 결코 크지 않기 때문에 일부 관객들에게 다소 지겨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토리 구조의 파동(Wave)이 갖고 있는 높이(Height)가 아닌 길이(Length)의 완급조절에 주목할 수 있다면 이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이런 점이 이 영화가 수많은 등장인물을 다루면서도 결코 지루하거나 늘어지는 작품이 아닌 이유이자 스토리 라인 자체가 담백하게 - 실망한 관객들은 밋밋하다고 표현하지만 - 느껴지는 이유다.

05.

과거 <씨네 21> 1018호를 통해 이예지 기자는 이 작품을 <메멘토>가 보여주는 주인공의 '시간성'에 대한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것과 비교하여 우진이 '신체'의 자기 동일성을 상실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다중 인격(Identity Disorder)'이라는 소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할리우드 작품들을 통해 다중 인격에 대한 플롯들은 자주 다루어졌지만, 이 영화 <뷰티 인사이드>가 보여주는 '다중 인격'에 대한 내용은 그동안 표현된 방식과 차이를 갖는다. 공통적으로는 두 가지 이야기 모두 결여된 정체성으로부터 발생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 낼 것인지, 또한 결여된 내적 자아를 찾아내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기존의 작품들이 개인의 내적 변화를 다룸으로서 주체(Subject)가 겪게 되는 혼란과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뷰티 인사이드>는 개인의 외적 변화를 통해 주체가 아닌 객체(Object)가 겪게 되는 혼란과 문제들에 대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06.

위에서 설명한 시각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이 작품에서 중요해지는 인물은 분명히 우진이 아니라 이수가 된다. 우진이라는 대상에 대해 이수가 겪는 문제는 사랑하는 대상인 우진을 스스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말기에, 그 이후 우진의 모습을 이수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녀는 우진이 자신의 존재를, 내가 우진이라는 사실을, 직접 알려주기 전까지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일종의 '인지 부조화' 문제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모습이 바뀐 우진이 사람이 많은 약속 장소에서 전화를 통해 이수를 놀리기 위해 자신을 찾아보라고 이야기 하는 장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물론 이수에게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체가 겪는 문제의 경우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과 달리, 그것이 객체의 문제가 되는 순간 그녀에게 주어지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존재할 수 없다. 우진의 곁을 떠나는 것 말이다.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는 아무런 생각없이 이수에게 장난을 친다.

▲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는 아무런 생각없이 이수에게 장난을 친다. ⓒ NEW엔터테인먼트


07.

위와 같은 장면, 모습이 바뀐 우진이 사람이 많은 약속 장소에서 전화를 통해 이수를 놀리기 위해 자신을 찾아보라고 이야기 하는 장면을 이번에는 우진의 시각에서 해석해 보자. 자고 일어나서 모습이 바뀌는 일은 우진에게도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 처음과 달리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일을 매일 아침 반복하다 보니 그에게도 일종의 익숙함, 루틴(Routine) 같은 것들이 생겼을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과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희석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 있어 문제는 지난 세월 동안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 하나가 있다는 것. 배우자를 찾는 일이다. 다른 모든 일들은 혼자서 해 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일만큼은 혼자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단 두 사람. 엄마와 상백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이수가 나타났다. 그 오랜 시간을 자신과 다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 주던 지점(Point) 하나가 그녀로 인해 채워진 것이다. 이수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우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에서 우진의 행동은 결코 악의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이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도 이제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보통의 연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갖고 있던 특수한 상황을 간과했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다.

08.

이번에는 우진의 어머니를 한 번 보려고 한다. 처음 우진의 모습이 바뀌었던 날, 그래서 울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날 그녀는 그런 아들을 보며 어떤 감정도 내색하지 않은 채 벗겨진 슬리퍼를 다시 신겨주고 포근히 안아주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엄마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모성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내 곁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로서의 어머니. 영화 초반부에 우진의 어머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진행되면서 전반부에서는 알지 못했던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변하는 우진의 상황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일종의 유전이라는 것. 물론 이 설정은 겉으로만 보면 아주 전형적인 장치로만 보여질 수 있지만 바로 직전에 설명했던 우진의 어머니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바뀐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 울면서 가게로 들어오는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것은 단순히 그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어머니로써의 모습이 아니라, 자식의 아픔을 당신이 대신해 줄 수 없음을 미안해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을 아들인 우진 또한 앞으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곁에서 평생을 지켜봐 왔던 어머니로서는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어서라도 자식만은 살리고 싶다는 부모들의 마음이 그 장면에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한 장면을 통해 두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점이, 더 나아가 그 두 마음 모두가 우리 부모님들의 진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우진의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더 되뇌게 한다.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의 엄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다.

▲ 뷰티인사이드 스틸컷 그의 엄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다. ⓒ NEW엔터테인먼트


09.

이 영화의 타이틀이 <뷰티 인사이드>라는 점과 더불어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진짜 메세지는 우진과 상백(이동휘 역)이 운영하고 있던 'Alx'와 후반부에 체코에서 다른 이름으로 운영했던 가구 디자인 업체와 이수가 일했던 가구 판매점 'Mama studio'에 숨겨져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이수는 가구의 모습만을 보고 업체를 선정했을 뿐인데, 두 번 모두 우진이 상품을 디자인하고 있었던 업체였다는 설정은 아마도 외모가 바뀌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내면은 숨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부분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만 같다.

10.

앞의 내용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에 대해 서사적 구조의 단조로움에 대해 아쉬움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진이라는 인물이 매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변한다는 것만큼 단조로움을 상쇄할 수 있는 더 큰 사건이 있을까? 너무 허구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소재 말이다. 이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그런 영화다. 앞서 이야기 한 모든 내용들을 다루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았고, 그 많은 배우들을 등장시키면서도 인물들 면면의 매력들을 놓치지 않은 작품. 이 글을 시작하면서 멜로/로맨스 장르의 부족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물론 이 작품 역시 기존의 멜로/로맨스 계보를 잇는 정통한 영화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족감을 표할 수 있었던 좋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영화 무비 뷰티인사이드 백감독 넘버링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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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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