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전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러시아와 경기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2대4 완패를 당했다. 수비는 시종일관 불안감을 노출했고 공격은 마무리가 부족했다. 그나마 0대4로 몰린 상황에서 한국은 이청용의 발에서 터져나온 패스 2방으로 일말의 희망을 안았다.

한국 시각 오후 11시 러시아 모스크바 VEB 아레나에서 열린 한국과 러시아의 평가전이 펼쳐졌다. 양 팀 모두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먼저 내년 자국 땅에서 열리는 FIFA 월드컵을 준비하는 러시아는 근래에 계속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상황이었다. 분위기 반전이 절실했다.

원정에 나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지만 최종예선 과정에서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최근 '히딩크 사태'도 터지면서 강한 의심을 받고 있는 형국이었다. 러시아와 한국 모두에게 경기 내용만큼이나 승리도 중요했다.

한국은 윤석영의 부상으로 왼쪽 측면 수비수 자원이 전무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변형 쓰리백 전형을 기반으로 한 3-4-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골문은 김승규가 지켰고, 쓰리백은 권경원-장현수-김주영으로 구성됐다. 허리에는 김영권-정우영-구자철-이청용이 출격했고, 최전방 라인에서는 손흥민-황의조-권창훈이 득점을 노렸다. 러시아는 쓰리백을 기반으로 한 3-5-2 포메이션으로 대응했다.

한국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쓰리백의 중앙에 위치한 장현수가 공격시 후방 지역에서 크게 위치를 부여받지 않고 자리를 잡았고, 본래 공격에 능한 이청용은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왼쪽 측면으로 자주 빠져나오는 황의조의 특성에 맞춰서 손흥민이 중앙 지향적으로 뛰었고, 오른쪽 측면 공격수인 권창훈도 자주 중앙 공격에 가담하면서 중원에 밀도를 높였다. 멀티 플레이어들의 능력을 활용해 공격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신태용 감독의 전술 의도가 잘 드러났다.

패스 과정이 예상했던 것보다 매끄럽게 흘러갔다. 문제는 마무리였다. 그라운드를 넓게 활용하면서 패널티 박스 근처까지는 종종 접근했지만 마무리 패스에서 세밀함이 떨어졌다. 마지막 패스가 부정확하니 슈팅 찬스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분위기는 러시아보다 한국이 잡아갔다.

그러던 순간 이날의 악몽에 예고편과 같은 장면이 발생했다. 전반 25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수비 상황에서 권경원과 김주영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서 페널티 박스 안에 있던 상대 공격수 알렉산드르 코코린에게 공을 헌납했다. 다행히 코코린의 슈팅이 골대 옆으로 빗나갔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3분 뒤에도 골키퍼 김승규에게 패스를 받은 권경원이 방심한 틈을 타 페드로 스몰로프가 강한 압박을 가했고 그대로 공을 탈취당했다. 스몰로프는 곧장 코코린에게 공을 전달했고, 코코린은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지만 슈팅이 골대 위로 넘어갔다.

두 번의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 한국 수비진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코코린에게 연속 슈팅을 내준 이후 권창훈이 위협적인 슈팅을 만들어 냈지만 러시아로 넘어간 분위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분위기를 탄 러시아는 전반 44분 코너킥 상황에서 스몰로프의 선제 득점으로 앞서나갔다. 먼 포스트에서 돌아들어온 스몰로프를 자유롭게 방치한 한국 수비진의 집중력 부족이 결국 실점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전반전 막판 실점을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기력이 지난 최종예선보다는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기에 후반전 경기를 기다리는 팬들은 다소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후반전 10분도 되기 전에 물거품이 됐다. 한국은 코너킥 상황에서 코코린의 머리를 거친 공이 김주영의 몸에 맞고 골망을 가르면서 추가 실점을 허용했다. 상대의 주요 공격수인 코코린을 놓쳤다는 점과 세컨드 볼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한 한국 수비의 집중력이 또 한번의 실점을 내주는 순간이었다.

A매치 데뷔골을 자책골로 신고한 김주영은 1분 후 자책골을 헌납했다. 러시아의 패스를 막는 과정에서 김주영의 발을 맞은 공이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운이 나빴다고 위안하기에는 두 번째 실점 이후에 우왕좌왕하던 한국 선수들의 모습이 세 번째 실점을 야기한 점도 있기에 변명은 불가능하다.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후반 37분 러시아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프가 방출한 공을 러시아 공격수들이 편하게 잡는 동안 한국 수비수들은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봤다. 김승규의 선방이 한 차례 나왔지만 쇄도하는 미란추크에게 네 번째 실점을 허용했다. 현재 국가대표팀을 향한 국민들의 시선이 따갑다는 사실을 아는 선수들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안일함이었다. 당장 실점 위기에 놓인 수비수들은 몸을 던졌지만 미드필더 기성용은 뒤에서 실점 장면을 관망했다. 한국 축구의 수비 집중력과 수비를 하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유일한 희망 이청용

한국이 0대4로 끌려가자 팬들은 자연스럽게 만회골보다는 추가 실점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참혹한 시간이었다. 그 순간 이청용이 등장했다. 후반 41분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이청용은 패널티 박스 안으로 정확한 크로스를 배달했다. 이청용의 발을 떠난 공은 지동원을 지나 공격에 가담했던 수비수 권경원의 머리에 전달됐고, 권경원은 정확한 헤더로 러시아의 골망을 갈랐다.

이청용의 장기인 '키패스(슈팅 직전 패스)'는 후반 추가 시간에도 빛났다. 다시 한 번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이쳥용은 수비 뒷공간으로 침투하는 지동원을 향해 날카로운 패스를 공급했다. 이청용의 패스로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잡은 지동원은 침착한 마무리로 만회골을 성공시켰다.

이날 이청용의 활약은 반전이었다. 이청용은 국가대표팀에서 잔뼈가 굵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능력있는 선수지만, 한동안 대표팀 유니폼을 입으면 무기력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어린 시절 이청용이 보여줬던 창의성과 과감함은 팬들의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하지만 러시아전은 달랐다. 공격수로 뛰었던 과거보다 수비적인 역할이 중요한 윙백 자리에서 이청용은 꽤나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앞서 언급한 패스는 여전했다. 이청용은 후방 지역에서 전방을 향해 안정적으로 패스를 공급했고, 상대의 강한 전방 압박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패스를 전달했다.

이청용 특유의 유연함도 돋보였다. 본래 이청용은 측면 공격수지만 개인의 스피드보다는 동료와의 연계를 통해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다. 이날 경기에서 이청용은 안정적인 패스를 기반으로 공수의 연결고리를 착실하게 했고, 좁은 공간에서는 유려한 몸동작과 드리블로 압박을 벗겨냈다. 과거처럼 전방 지역에서 상대 수비를 허무는 쾌감은 없었지만, 후방 지역에서 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전개했다. 모든 상황에서 흔들림 없이 유연한 대처 능력을 보여줬다. 이청용을 거쳐간 공은 대부분 살아서 한국 선수들에게 전해졌다.

윙백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인 수비도 나쁘지 않았다. 이청용은 수비시에 스토퍼인 김주영과 빠르게 간격을 좁혀 러시아 공격수들을 협력 수비로 방해했다. 이청용의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도 수비 장면에서 도움이 됐다. 이청용은 러시아 측면 공격수들의 움직임에 한 발짝 먼저 반응하면서 공을 차단하기도 했다. 윙백 기용시 가장 불안했던 수비력 측면에서 이청용은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오른쪽 윙백 이청용의 등장은 장차 대표팀 운영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한국은 차두리의 은퇴 이후 마땅한 오른쪽 측면 수비수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안고 있다. 많은 선수들이 거쳐갔지만 그 누구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단 한 경기 활약이지만 이청용이 러시아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던졌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대표팀에서 점차 '계륵'이 되어가던 이청용 개인에게도 러시아전 활약은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좋은 경기력과 승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며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 했던 신태용호가 2대4 패배로 더 깊은 늪에 빠졌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시절보다 경기력이 좋아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월드컵 본선을 고려하면 한참 멀었다. 결과도 놓쳤다. 그나마 돌아온 이청용이 오랜만에 '클래스'를 보여준 것이 위안이었다. 러시아로 가는 신태용호의 항해가 계속해서 높은 파도에 부딪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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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전 이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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