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영화제가 문을 열고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한국사회의 여성인권은 어디쯤 와 있을까요? 스크린에는 여성을 폭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연출한 영화가 범람합니다. 동영상 스트리밍 채널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처럼 취급됩니다. 2017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멀리 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주제는 '지금, 당신의 속도로'입니다. 여성인권이 침해되는 현실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향해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분명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치열하고 용기있는 도전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만나보세요.

혁명이란 뭘까. 자본주의를 깨부수고 자본주의 너머의 세상을 볼 때가 혁명인 걸까. 아니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위시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의 라이프 스타일이 통째로 바뀌는 사건쯤이 되어야 혁명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걸까. 혁명과 세트로 따라다니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우리나라에서 과포화 상태인 '민주주의'다. 많은 사람이 지난 탄핵 정국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일컫는다. 그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시청 광장, 광화문 광장 등 물리적인 대규모 시위에서만 쓰이곤 한다. 이런 민주주의는 시위 없는 평일의 일상에선 힘을 잃어버린다. 민주주의와 혁명은 주말, 광장, 응집한 군중들이 아니라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속한 단체의 활동가들이 외부 강의를 나갈 때마다 꼭 인용하는 문구가 있다.

"조직과 제도로부터 거리를 두는 사람들의 태도는 일터에서 겪은 업무 경험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리처드 세넷, <장인> 69쪽)

이 문장은 일상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공론장에서의 정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이 논의에 따르면 광장도 중요하지만, 광장의 경험이 있기 위한 일상 역시 중요하다. 일상 속에서도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민주적으로 의사 결정을 진행하며 함께 규칙을 고치는 사소한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거대한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도 광장에 나와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혁명도 광장에 복속되지 않고 일상의 자리로 나와 그 나름의 방식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이번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아래의 세 다큐멘터리는 일상에서 광장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혁명을 이끌어내는 여성들을 조명한다.

장애가 나를 정의하도록 두지 않겠어 <나의 하루>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나의 하루>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나의 하루>ⓒ 한국여성의전화


5분이라는 매우 짧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루>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다큐멘터리다. <나의 하루>의 주인공인 세라 김은 뇌성마비를 앓는다. 다큐멘터리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장애를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병명으로 소개하지 않고, 머리와 몸의 부조화에 대해 길게 풀어 설명한다.

'머리는 발에게 펭귄처럼 뒤뚱거리지 말래. 하지만 신호가 발까지 가는 법이 없지. 머리로는 완벽하게 말하고 있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충격적이지. 머릿속으로는 벌써 이 편지를 다 썼지만, 오른손으로만 타이핑할 수 있어.'

같은 하루를 살아도 세라 김의 하루는 다른 이들에 비해 밀도가 굉장히 높다. 일상의 과업들을 수행하는 데에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지만 세라 김은 끝내 자신이 '장애로 정의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녀는 일상 속에서 몸의 감옥을 이겨내며 나날이 혁명의 시간을 산다.

Girls Make Games <소녀, 레벨업!>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소녀, 레벨업!> 스틸컷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소녀, 레벨업!> 스틸컷ⓒ 한국여성의전화


초등학교 때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출시됐다. '네가 스타를 해?' 거짓말 말라던 동급생 남자아이들과 하교 후 피시방에 몰려가 당당하게 초토화해주고 난 뒤에야 게이머로 '인정'이라는 걸 받았다. 신작 게임 출시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밤을 꼴딱 새운 날에도 내 앞자리의 남자애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여자애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냐?' 게임을 좋아하는 게 무슨 대단한 업적인 것도 아닌데 게임은 늘 남성만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여 있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것뿐인데도 여성은 늘 자신의 '게임 실력'을 증명해야 하고, 증명해도 비하 받으며, 게임 세계 안팎에서 차별에 노출된다.

<소녀, 레벨업!>에 등장하는 파키스탄 여성 라미라 샤비르는 나처럼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게임을 즐겨왔다. 게임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익히게 되고 스스로 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자 그녀는 MIT에 지원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입학하지 못할 뻔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간신히 입학한 그녀는 자신이 바늘구멍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이 문을 넓히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3주간의 비디오 게임 프로그래밍 캠프 <Girls Make Games> 은 그 일환이다. 이 캠프에서는 소녀들이 직접 게임을 기획하고 개발한다. <소녀 레벨업>은 이 캠프를 기획한 라미라 샤비르의 이야기를 게임 그래픽으로 담고, 이 캠프에 참여하는 다른 소녀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소녀, 레벨업!> 스틸컷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소녀, 레벨업!> 스틸컷ⓒ 한국여성의전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물들에 관심이 많은지…. 게임 제작은 단순히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어린 여성들이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탐구하고 협업을 통해 제작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게임 제작 과정에 여성 팀원이 대다수 참여한다면 어떤 게임이 등장할까? 지금은 게임 기획이나 개발은 물론이고 게임의 대상층도 남성인 경우가 많아 대부분 남성의 취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여성들이 여성의 서사로 게임을 만든다면 어떤 게임이 나올까.

소녀들은 소년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협력하여 하나의 게임을 만들어 낸다. 이 캠프는 게임 산업의 전환까지 목표로 하는데, 그보다도 '여성이 게임을 한다. 그리고 만들기까지 한다.' 는 아주 작은 명제를 유쾌하게 보여주는 즐거운 행사다. 우리나라에서도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시도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캠프는 정말이지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We Will Organize <헤더 부스 : 세상을 바꾸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헤더부스 : 세상을 바꾸다> 스틸컷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헤더부스 : 세상을 바꾸다> 스틸컷ⓒ 한국여성의전화


내가 속한 단체는 사회적 가치, 특히 일상의 민주주의를 일구는 커뮤니티를 만든다. 활동 내용을 소개하면 으레 '커뮤니티와 조직화는 다르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는다. 그러니까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여 년 전 대학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말이지만 나는 '조직화'가 뭔지 여태 정체를 모른다. 후배 밥 사주라는 말인가, 아니면 세미나에 끌어들이라는 말인가. 아무튼, 뭔가를 해서든지 조직이 잘 굴러가도록 사람을 모으라는 말인 것 같았다. 토론과 공부를 해서 하나의 합의점을 만들고, 그 합의점을 토대로 조직을 만드는 건 아니고 대부분 이미 있는 조직을 유지할 때 그런 말이 나온다. '조직화'에서는 조직이 사람보다 먼저 있다.

우리 단체에서는 '조직화'라는 말은 쓰지 않지만, '오거나이징'해야 한다는 말은 아주 많이 쓴다.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도 오거나이저의 역할이다. 오거나이징을 우리나라 말로 '조직화'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오거나이징과 우리나라에서 상용되는 '조직화'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직화 운동이 중앙집권적이라면, 오거나이징은 탈중앙적이다. 조직화는 조직에 초점을 맞추지만 오거나이징은 개개인들에게 집중한다. <헤더 부스: 세상을 바꾸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헤더 부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조직 운동을 연결하세요. 환경 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이해관계로서 참여하게 하세요.'

헤더 부스는 광장의 혁명을 일상처럼 살고 있는 사람으로, 60년대 흑인 인권 운동부터 여성 낙태권 운동, 환경 운동, 정치세력화 운동 등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단체를 만들고 오거나이징 해왔던 '프로' 오거나이저다. 여러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하고 여성 오거나이저를 위한 아카데미도 설립했으며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사회적 정의를 위한 오거나이징에 투신해왔다.

헤더 부스에게 '오거나이징'이란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그녀는 오거나이징을 멋지게 포장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짜리의 '전략 차트'를 채우게 하고, 조직이 달성해야 하는 골을 상정하며, 그 골에 따라 해야 할 일을 분업하고 나누는 것, 함께 하는 사람들을 혼자 두지 않는 것, 오해가 생겼을 때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것- 이처럼 헤더 부스가 말하는 '오거나이징'은 매우 구체적인 과업을 묶은 용어다. 그녀는 오거나이징을 단순히 상찬하기보다 오거나이저의 역할과 책무를 사실적으로 꿰뚫어 본다. '오거나이저의 일 가운데 9할 이상은 후속 조치입니다.' '서로 오해하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죠. 오거나이저는 다시 사람들이 협력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헤더부스: 세상을 바꾸다> 스틸컷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헤더부스: 세상을 바꾸다> 스틸컷ⓒ 한국여성의전화


오거나이징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이고 담백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데도, 본 다큐멘터리는 헤더 부스의 생애를 조명하느라 이 부분들에 집중하지는 못한다. 헤더 부스만이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놓친다는 데에서 다소 아쉽지만 그건 작품이 미숙해서라기보다 헤더 부스 자체가 너무나 많은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가입한 미국 시민단체 OFA(Organizing For Action)의 커뮤니티에서는 간혹 몇몇 활동가들에 대한 추모 메시지가 올라온다. 대부분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죽는 날까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온갖 진보 시위에 참여해 온 사람들이었다. 헤더 부스도 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여전히 오거나이징을 말하고 시위에 참여하며 계속해서 오거나이징 할 것이란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어떤 것이 이들을 계속해서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고, 운동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진심으로 이 동력이 궁금하다. 그건 단순히 개인의 에너지일까, 아니면 모두가 롱런할 수 있게 돕는 '조직화' 아닌 조직화의 기술인 걸까.

나 역시 오래도록, 늙어서까지도 여전히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며 활동하고 싶다. <헤더 부스: 세상을 바꾸다>는 그런 미래가 완전히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좋은 전략가는 승리를 취하기도 하지만, 승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사실 전략 차트를 작성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골(goal)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전략 차트에 적히지 않은 다른 승리 역시 헤더 부스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달성한 승리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지닌 하얀 머리카락 그 자체다. 그토록 긴 세월을 계속 활동하며 함께 달린다는 사실 그 자체로 그녀는 진짜 성공한 '오거나이저'였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의 작성자 갱님은 빠띠에서 활동하는 민주주의 활동가입니다. 본 기사는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및 블로그에도 업로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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