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 트뤼포> 속 알프레드 히치콕.

<히치콕 트뤼포> 속 알프레드 히치콕. ⓒ ㈜안다미로


"성공적인 영화일수록 성공적인 악당을 보여준다." (The more successful the villain, the more successful the movie) -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악당이 없는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악'의 스케일 차이일 것이다. 주인공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옆집 아저씨도,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싸이코도 결국 영화가 그어 놓는 선과 악의 테두리 안에서 기능하는 악인이다.

여러 면에서 악인, 혹은 악당은 선한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종종 과거의 트라우마 혹은 상처에서 기인한 비틀린 내면(예: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배트맨>의 조커)을 가지고 있고 이를 보상받거나 복수하기 위해 악인이 된다. 그들의 대상은 개인 일 수도, 불특정 다수 일 수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 악인은 사회 혹은 시스템적 운영의 실패에서 기인한 사회적 부산물이거나 피해자를 대변한다.

게으르고 원시적인 악당

 영화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으로 활약한 엄태구.

영화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으로 활약한 엄태구.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런 면에서 볼 때, 영화 속 '악당'은 선인(善人)보다 사회적 인덱스 (social index)로 보기에 더 유용하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선한 주인공보다는, 불만과 탐욕이 가득한 악인을 통해 우리는 이 사회의 문제점과 부패를 목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악당은 단순히 개인적 상처에 잠식되거나 사회에 찌들어 독이 오른 평면적 인물이 아니다. 광기와 허영의 집약체였던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 욕망과 자기 연민 사이의 변이체가 되어버린 '미스터 하이드'(<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세대를 걸쳐 회자 되는 것은 그들의 양가적, 혹은 모호한 시선과 태도가 부르는 호기심과 매력일 것이다. 성공적인 악당이 성공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했던 히치콕의 말처럼, '절대 악'으로써만 기능하는 악당은 원시적이고 게으른 작법의 산물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보이는 거의 모든 악당은 매우 단면적, 즉 이 '게으르고 원시적인 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악당들은 변주와 진화 없이 이미 창조되고 인식되었던 '악역'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 다만 다른 배우와 환경을 통해. 최근 한국 영화의 문제점이라고 인식되는 점 중 하나는, 캐릭터 설정이 특정 직업의 스테레오 타입이나 문화적인 편견 '만'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 적으로 부족한 내실을 배우의 연기로 채워가는 식이다. (관련 기사: 세상을 바꾼 기자들, 저널리즘을 다시 생각게 하다)

다시 말해, 요즘 한국 관객들은 부패 형사의 캐릭터는 어떻게 나올지, 악덕 검사의 말투는 어떨지, 식민지 시절 일본 군인은 어떤 이미지 일지, 통달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 자명한 원칙들이 별다른 도전 없이 지켜지고 있다는 얘기다.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의 이슈로 초점을 맞추자면 이 문제가 더더욱 명백해진다. 이 악당들은 전사(前史) 와 명분이 없다. 다시 말해,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 기능적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소품 수준에서 멈춘다. 감정적인 변이도, 인간적인 분열도 부재한, '소구적' 존재다. 가령, <덕혜 옹주>에서 일본 정부에 편승한 조선인 '한택수(윤제문 분)' 역은 이번 <군함도>에서의 송종구(김민재 분) 역과 어떻게 다른가? 혹은 <밀정>에서의 하시모토(엄태구 분)는? 이들은 같은 시대상의 인물을 재현하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문제들과 대립하는 다른 인물들이다. 영화 속에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이들의 일관적인 악마성, 무자비함은 배우들 연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안타깝지만, 캐릭터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혹은 그럴 만한 산업적 조건이 불가하거나) 이를 드러내는 영화적 작법에 실패한 것이다.

<택시운전사>와 <군함도>도 피할 수 없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유해진, 송강호, 최귀화.

영화 <택시운전사>의 유해진, 송강호, 최귀화. ⓒ (주)쇼박스


호평과 혹평이 갈리는 작품이지만, <택시운전사>와 <군함도>도 악역의 설정에 대해서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귀화가 맡았던 악랄한 사복형사 역은 욕하고 패(기만 하)는 여타 다른 영화들 속 군사 정권기의 형사들의 역할과 일면도 다르지 않다.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언급했듯, <택시운전사>는 "역사적인 의리를 지킨 영화"고, 나 또한 그 점에 대해 완벽히 동의한다. 하지만, 영화적으로만 놓고 보았을 때, <택시운전사> 속 사복형사의 캐릭터는 1970~1980년대를 향한 우리의 서러움과 분노가 투영된 절대 악마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원시적이다.

물론,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고 현실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2017년의 눈으로 70년대 반공 영화를 보면 왜 유치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선과 악을 다루는 방법이 극히 단순하고 이분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기에 제작된 반공 영화들에서 공산당은 근친을 일삼고 인육을 먹는 초현실적인 사탄으로 그려졌다. 물론 그 수준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영화의 악당 캐릭터들은 크게 진화하지 못했다. 한국영화의 악당에는 장르가 존재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조폭 장르 악당', '군사 정권기 장르 악당', '전쟁 영화 악당'처럼 말이다.

2012년, <액트 어브 킬링(Act of Killing)>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쿠데타 기간에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수백 명을 맨손으로 죽인 정부 인사, 안와르 콩고라는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가 그 많은 사람을 어떤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죽였는지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장면도 충격적이지만, 더 아연실색한 순간은 그런 그가 어린 손녀에게 오리를 괴롭히지 말라며 꾸짖는 장면이다. 악마의 악마성이 아닌, 보편성에서 악의 심연(深淵)을 보았다는 느낌을 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영화의 악당에는 강도(intensity)만 있고 복합성(complexity)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 영화의 전반적인(스토리와 설정 등을 포함한) 질적 정체(停滯)에도 적용 가능한 이슈다. '악당'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지면이지만, 분명 많은 이들의 한국 영화의 '정체'에 관해서 공감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한국 영화는 고민과 숙고가 필요하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제도적 이슈와 독과점 문제로 영화계가 편안하지 않지만, 결국 이러한 문제 역시 창작적인 결핍과 직결되는 것이다.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고 우리 모두 날을 세워야 한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기에 검열과 영화산업 규제로 초래되었던 영화의 질적 하락이 지금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기형적인 시장구조로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 다채로운 '악당'은 다채로운 시장을 담보한 사회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악당 영화평 군함도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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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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