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late in the evening; she's wondering what clothes to wear......."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멈칫했다. 마치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And I say, 'Yes, I feel wonderful tonight........"

에릭 클랩튼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멈출 듯 다시 이어지는 목소리는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추억의 빗장을 옆으로 밀어냈다. 곧이어 내 마음은 희뿌연 먼지와 함께 비둘기 서성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해졌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에릭 클랩튼의 목소리는 아릿함으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부러울 것이 없던 때, 그 때는 주어지는 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물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도 있었지만 강의를 열심히 듣고, 충실히 과제를 제출하고, 성적을 잘 받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다. 그러기 위해 시험 때면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것은 물론 가끔은 과대표의 추천으로 미팅에 나가 꼿꼿한 자존심을 세우고, 때로는 방학을 이용해 봉사활동을 하며 한 몫하고 있다는 어쭙잖은 생각으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고, 한 번쯤은 선배들의 은근한 압력으로 정신이 희미해질 때까지 술을 마시며 서툰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다른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수업이 끝나면 으레 학교 앞 카페를 전전하며 친구들과 수다를 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앨범 재킷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앨범 재킷 ⓒ 에릭 클랩튼


대로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돌고 돌아야 만나는 작은 카페는 커피보다는 자리 인심이 좋아 졸업할 때까지 우리의 아지트로 삼고, 학교 앞 대로변에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2층 카페는 분위기도 좋고 편안한 의자에 커다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반가워 나만의 즐거움을 누리고, 빈티지 내음이 물씬 나는 카페는 서비스로 주는 모닝 빵으로 배를 채울 수 있어 제집 드나들 듯 하고, 그리고 비탈 길 한 쪽에 자리 잡은 카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마다 앙증맞은 화분으로 눈길을 잡던 카페는...

그 날은 수없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에 우리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아지트보다는 눈에 띄는 카페를 찾았고 그 때 눈에 띈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제법 깔끔한 실내와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다른 무엇보다 편안한 의자에 우리는 만족했고, 그곳은 우리의 두 번째 아지트가 되었다.

그 후로, 한 번, 두 번, 그곳을 드나들면서 우리는 카페 주인과 눈인사를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고 주인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직원들과는 허물없이 농담도 나누게 되었다. 거기에 그곳에는 중앙에 작은 무대가 있었고 한 쪽에는 전자기타가 있어 가끔씩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저 분은 우리 형님 후배인데 홍대 앞에서 꽤 유명한 가수에요."

커피를 놓아주며 말을 건네는 직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제야 카페 주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큰 키에 마른 몸집으로 말이 없던, 주인이라기보다는 손님처럼 무심하던 그는 나보다 6살이 많은, 음악이 좋아 한 때는 그룹사운드 활동도 했다는 것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우리는 그곳에서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It's late in the evening; she's wondering what clothes to wear......"

카페 안으로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말을 멈추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중앙에는 한 남자가, 주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에릭 클립튼의 'Wonderful Tonight'을.

지금도 기억난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풀어내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가 나의 가슴에 자리 잡았던 때가. 그 후로도 가끔 그는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그의 노래를 넋 놓고 듣곤 했다.

"우리 형님이 원래 노래를 안 하시는데. 에릭클립튼의 'Wonderful Tonight'은 제일 좋아하 는 노래예요. 형님이 이 노래를 부르는 건 바로 학생 때문이에요."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온 나에게 직원이 건네는 말은 가슴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뜨렸다.

직원의 의미 있는 웃음을 모른 척 하고, 그의 'Wonderful Tonight'을 서너 번 더 들은 후, 나는 그와 마주하게 되었고 그 만남을 시작으로 방학인데도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뮤지컬을 보고, 느닷없이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하고. 그렇게 나의 여름은, 나의 사랑은 열정으로 뜨거웠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는 나에게 결혼을 운운했고 엉겁결에 그의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그 때만해도 사랑하면 결혼은 당연한 것으로, 결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탓에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전부였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당시의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그저 편안한 의자에 앉아 그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 것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얗게 눈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 나는 나의 사랑을, 가슴 떨리는 첫사랑을 끝냈다. 하얀 눈을 맞으며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의 빨개진 눈시울을 뒤로 한 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가슴 속에 그와 함께 했던 사랑을, 그가 불러주었던 'Wonderful Tonight을 담으며.

지금 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나를 기억하고는 있을까? 이제 봐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진다. 가슴 속에 퇴색해버린 설렘의 작은 날개짓과 함께.

눈 내리는 날 밤, 하늘에서 흩뿌려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내 가슴속에는 퇴색해버린 설렘이 작은 날개짓을 하고.

 ".......Oh my darling, you were wonderful tonight........"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BGM 응모글입니다.
내 인생의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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