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싸이코> <현기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동성애'는 히치콕이 '살인'과 더불어 가장 집착했던 소재 중 하나다. 그의 작품들에서 동성애의 묘사는 당시 검열에도 불구하고 은유적으로나마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가 이러한 주제를 타깃으로 하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 <로프>(Rope, 1948)는 게이 연인인 주인공들이 저지른  살인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아서 로랑(Arthur Laurant)은 히치콕이 <로프>라는 작품에 내재한 동성애 코드에 매우 매료되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히치콕은 <로프>의 원작에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동성애를 소멸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암암리에 게이임이 알려져 있던 배우들(존 달, 팔리 그레인저)을 주인공들로 캐스팅하기로 한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이러한 배우들의 성 정체성 혹은 시나리오 상의 동성애 코드가 영화에 공공연히 드러날 수는 없었다.

히치콕은 대신 영화적인 테크닉, 특히 편집을 통해 동성애 코드를 암시했는데 가장 많이 언급된 예로는 주인공인 게이 커플 신에 사용된 디졸브(다음 신으로 넘어 갈 때 한 점을 중심으로 화면이 흐려지는 것)다. 영화 전반에서 장면이 넘어가는 시점이 주로 이 주인공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몸을 밀착하고 있는 뒷모습 혹은 그들이 입고 있는 코트 위에서 디졸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로랑은 히치콕이 동성애의 체위나 동성애를 암시하는 '옷장 안의 성 정체성(Sexuality in the closet)' 을 은유적으로 표현 하기 위해 이런 기법을 썼다고 말했다.
 영화 <로프>, 두 남성이 밀착해 있는 쇼트.

영화 <로프>, 두 남성이 밀착해 있는 쇼트. ⓒ Universal Studios


히치콕의 동성애 묘사의 계보는 그가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영국에서 만든 초기 무성 영화들 중 하나인 <하숙인>(192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는 실제 런던에서 일어난 '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 연쇄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 하숙집에 머물게 되는 '미심쩍은 남성(아이버 노벨로 역)'이다 . 순진한 하숙집 주인 딸은 밤만 되면 사라지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둘은 위험한 사랑을 시작한다. 스릴러 영화의 전형이 그렇듯 영화의 중점은 이 하숙생이 진짜 연쇄살인범인가 아닌가에 맞춰져 있다.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 아이버 노벨로는 영국의 브로드웨이와 극장가를 누비는 일류 배우 중 하나였고, 실제로도 동성애자였다.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 히치콕은 그의 3번째 장편 영화에 노벨로를 출연시키고 이를 통해 본인도 유명해지고자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히치콕만의 독특한 '장난'이 이 작품부터 시작된다. 노벨로의 (이미 극장가에는 다 알려진) 성 정체성을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것이다.

가령, 처음 하숙집에 들어가 묵을 방을 소개 받는 노벨로가 방 안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바라 볼 때 쓰인 딥 포커스는 시네필 들이 극찬해 마지 않는 <시민 케인>의 그 딥 포커스 신 만큼이나 꽤 영리하게 쓰인다. 이 장면에서 금발 머리 여자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포유동물이 사냥감을 보듯 스캔 하는 노벨로의 시선이 시점쇼트로 처리되다가 딥 포커스 쇼트로 넘어간다.

 영화 <하숙인>의 한 장면. 히치콕만의 독특한 '장난'이 이 작품부터 시작된다.

영화 <하숙인>의 한 장면. 히치콕만의 독특한 '장난'이 이 작품부터 시작된다. ⓒ 울프 & 프리먼 필름 서비스


이 쇼트에서 노벨로는 서서히 거울 안(프레임)으로 걸어 들어오고 관객은 그의 움직임을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된다. 거울 안에서 (뒷모습으로)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벨로의 모습이 곧 프로필 (옆모습) 클로즈 업 쇼트로 이어지는데 이 쇼트에서 그는 그림 안의 여자를 보고 매우 불편하고 분열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딥 포커스 안에 등장하는 거울 속의 노벨로는 그의 캐릭터가 가진, 여자를 향한 이분적인 자아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특히 거울 밖과 안에서 동시에 보여지는 노벨로의 모습과, 그림 안의 여자를 보고 분열하는 그의 모습이 프로필 쇼트로 보여지는 것은 분명 그가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프로필 클로즈 업은 히치콕이 인물의 양가성을 강조할 때 쓰는 장치로서, 이후의 작품인 <현기증>에서도 1인 2역을 연기 하는 킴 노박 캐릭터를 통해 보여진 바 있다.

 영화 <현기증>의 킴노박 옆모습.

영화 <현기증>의 킴노박 옆모습. ⓒ 울프 & 프리먼 필름 서비스


다른 예로는, 노벨로와 하숙집 딸인 데이지의 로맨스가 그다지 설득력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데이지가 노벨로와 있을 때와 조(그녀를 짝사랑 하는 형사)와 있을 때 묘사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조와 데이지의 키스신은 큰 기교 없이 평범한 연인의 키스로 그려지는 반면 노벨로와의 키스는 슬로우 모션 같은 극화된 기법을 과장되게 사용함으로서 이 키스신이 연출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키스는 하되 노벨로가 노골적으로 다른 곳을 보거나 원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도 있다.

 노벨로와의 키스는 슬로우 모션 같은 극화된 기법을 과장되게 사용함으로서 이 키스신이 연출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키스는 하되 노벨로가 노골적으로 다른 곳을 보거나 원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도 있다.

노벨로와의 키스는 슬로우 모션 같은 극화된 기법을 과장되게 사용함으로서 이 키스신이 연출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혹은 반대로 키스는 하되 노벨로가 노골적으로 다른 곳을 보거나 원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도 있다. ⓒ 파라마운트 픽처스


또한, 노벨로가 여성을 바라 볼 때의 시선처리 역시 계산된 듯 보이는데, 그가 패션쇼 장에서 옆자리 여성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장면에서 그는 그녀가 담배를 무는 것을 인지하되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정면만 보며 의식적으로 불을 붙인다. 많은 영화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과는 매우 상반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내러티브 진행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히치콕이 굳이 노벨로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신을 넣은 게 아닌지 추정해 보게 된다.

<하숙생>은 <로프>가 만들어진 시점 보다 2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이지만 히치콕이 처음으로 '동성애'라는 소재에 매료되어 이를 영화적인 장치로 사용하기 시작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히치콕과 노벨로의 협업은 그 후의 작품 <다운 힐>로 이어지고 이 작품 역시 히치콕의 유머 가득한 동성애 코드로 가득하다.

히치콕이 천재적인 거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카메라 워크나 미장센, 그리고 그 외 미학적 요소들로 세대를 거쳐 칭송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하숙생> 같은 초기 작품에서 부터 '동성애' 소재를 작품 안에 녹여내는 기술(?)을 발휘해 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배우가, 혹은 원작이 가진 스크린 밖 '페르소나'를 영화적 장치로 변환했던 그의 시도들은 그가 영화사를 빛낸 부동의 천재 감독이 될 것임을 보여준 전조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아노에 게재 했던 글 일부를 수정 하였습니다.
히치콕 동성애 묘사 배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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