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에가 자전거를 타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

벨리에가 자전거를 타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 영화사 진진


<미라클 벨리에> 같은 영화를 보면 늘 질질 짜게 된다. 화면에서는 이제 막 만개할 삶을 향해 달려가는 '행복한'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눈물을 턱 아래로 떨구며 청승을 떤다. 그게 책이든, 영화이든, 아니면 이웃집 아줌마 아들 사연이든, '성장 테마'가 들어가는 이야기에 나는 이렇게 되고 만다. 누군가의 삶이 행복해지려는 조짐을 보는 것이 마냥 감격스럽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노래와 유쾌한 에피소드가 가득한 이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좌절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성장 스토리에서라면 '꼭' 나오는 방해물들이 무겁지 않게 곳곳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그 어떤 방해물에도 불구하고 결국 새장 밖으로 날아간다. 좋은 영화는 바로 이 방해물 이야기에도 정성을 다한다. 어느 누군가의 진실한 삶이 방해물의 형태로 드러나면, 그때부터는 방해물조차 공감을 일으킨다.

부모가 반대하는 이유

 가족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가족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영화사 진진


이 영화에서 방해물은 '가족'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이라면 자식이 재능 있다는 소리를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 자기 삶마저 뒤로 제쳐 놓고 자식의 미래에 사활을 걸지도 모른다. 본인이 못 이룬 꿈, 또는 꿔 본 적도 없는 꿈을 내 자식이 꾼다는 것마저 꿈 같이 느껴진다면서. 하지만 영화에서 벨리에 부모는 자식이 재능 있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고 도리어 화를 낸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온몸으로 거부한다. 4인 가족에서 3인이 청각, 언어 장애인이고, 벨리에 혼자 듣고 말할 수 있는데, 벨리에의 재능이 '노래'이기 때문이다.

벨리에의 재능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생활 전체에 지각변동을 불러온다. 외부 세계와 가족 사이의 소통은 벨리에가 다 떠맡아 왔기 때문. 젖소가 송아지를 낳을 때도 벨리에가 앞장서 도와주러 온 아저씨들을 상대하고, 등굣길, 하굣길에도 휴대폰 건너에 있는 어른과 부모님이 해야 할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다. 치즈 장사를 할 때도 벨리에가 없으면 손님이 원하는 치즈를 보여줄 수도, 팔 수도 없다.

그런데 벨리에가 부모님 몰래 합창단에 들어 노래를 시작했다니! 거기다가 오디션을 보러 파리에 간다니! 오디션에 합격하면 파리에서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부모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남겨진 사람들도 걱정이고, 혼자 지낼 딸도 걱정이다. 무엇보다 부모는 딸이 노래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지 않는가! 자식이 좋아하는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된 상황에 부모는 낙심한다. 그런 재능이라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영화에서 신선한 점은, 장애인 가족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못 듣고, 못 말할 뿐 (당연하게도) 각자 개성 있는 한 명의 개인이다. 괴짜 같은 행동도 잘하고, 그 어디에서도 당당하며, 심지어 아빠는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선거 출마는 좀 어렵지 않겠냐'는 벨리에의 말에 아빠는 '내게 장애는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장애는 생활하기에 조금 불편할 뿐, 하고 싶은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건 아니다.

부모의 이런 생각은 벨리에가 태어났을 때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 같으면 태어난 아이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감격할 것 같은데, 이들 부모는 달랐다. 그들은 자식 역시 청각 장애인으로 태어나 '당당히 가족의 일원'이 되길 바랐다. 들을 수 있게 태어났다면 적어도 '마음만은 귀머거리'가 되길 바랐다. 마음의 정체성만은 '우리와 같길' 바란 것이다. 이런 바람이 우리에겐 섬뜩해 보이고, 딸조차도 그 소리에 화를 내지만, 나는 부모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그 사회가 장애에 대한 편견이 적어서일 것으로 생각했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벨리에가 처한 상황은, 그러니까 이렇다. 비장애인인 딸이 왠지 미운 오리 새끼같이 돼버렸는데, 가족은 그 미운 오리 새끼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벨리에가 파리에 간다는 건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이룰 수 없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는 게' 되는 상황. 당연하게도 어린 벨리에는 이런 상황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하지만, 역시, 부모는 결국 자식의 꿈을 승낙한다.

벨리에, 비상하다

 딸의 노래를 들으려는 아빠의 뭉클한 모습.

딸의 노래를 들으려는 아빠의 뭉클한 모습.ⓒ 영화사 진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부모의 입장을 보여주면서, 그 부모가 마음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던 합창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학생들의 아름다운 화음을 듣는 가운데, 듣지 못하는 세 사람만 멀뚱멀뚱 앉아있는 모습. 우리의 이해를 돕고자 영화는 얼마간 실제로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입만 뻐끔거리는 아이들, 좋은 건지 별로인 건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관객들뿐이다. 소리가 꺼지자 나 역시 세 사람처럼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한마디로 '느끼지 못하고 감동하지 못했다.' 부모의 가장 큰 두려움이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딸이 가장 행복할 때, 부모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멀뚱히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기립 박수하는 통에 함께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치던 세 사람.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딸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만은 확실해 보여 그저 기쁠 따름이다. 그래서 집에서 아빠는 딸에게 다시 한번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느냐고 요청하고 아빠는 딸의 목 울림을 통해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딸을 응원한다. 그런 부모에 감사해 하며 파리 오디션에서 벨리에가 노래를 부르던 모습. 이 모습에서 듣지 못하는 부모를 향한 최대한의 사랑이 표현됐다.

성장을 테마로 한 이야기에서 자주 나오는 부모의 말은 이것이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날 떠나니.' 이 영화에서도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벨리에의 대답처럼 '부모님이 날 사랑으로 키워줘서 내가 꿈을 꿀 수 있게 됐어.'가 된다는 것. 부모의 사랑을 받고 건강하게 자란 아이는 자연스레 부모를 떠나 자기 삶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런 자식 앞에서 부모는 당황하기 마련이고, 이런 시간을 통해, 부모 역시 성장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식은 우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상하는 것뿐이라는 걸. 부모의 행복은 자식이 비상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응원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에서 벨리에가 마지막에 부른 노래는 미셸 사드루의 '비상'이었다. 오디션 심사관의 말처럼, 선곡이 참 좋았다.

'비상'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사랑하지만 가야만 해요 /오늘부터 두 분의 아이는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날개를 편 것뿐 /부디 알아 주세요 비상하는 거예요/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없이 /날아가요날아 올라요

어머니는 어제 근심스런 눈으로 절 바라보셨죠 /이미 뭔가를 알고 계신것처럼/
하지만 전 아무 문제 없다고 안심시켜 드렸죠/ 어머닌 모른 척 해주셨죠아버진 어색하게 웃으셨고요

돌아가지 않아요/ 조금씩 더 멀어질 거에요 /역 하나 또 역 하나를 지나면/ 마침내 바다를 건너겠죠

내가 걸어오는 길에 흘린 눈물을 /부모님은 아실까요 /전진하고픈 나의 약속과 열망/
나 자신에게 약속한 내 인생을 믿을 뿐 /멀어지는 기차 안에서 왜, 어디로, 어떻게 갈지 생각에 잠겨요

내 가슴을 억누르는 /이 새장을 참을 수 없어요/ 숨을 쉴 수가 없죠/ 노래할 수도 없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날개를 편 것뿐 /부디 알아 주세요 비상하는 거예요/ 술기운도, 담배 연기도 없이 /날아가요 날아 올라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심을 담습니다. 다만 진심입니다. 제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제 진심이 닿으리라 믿습니다. 공채 7기 입사, 사회부 수습을 거쳐 편집부에서 정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오마이스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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