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승리가 보인다' 지난 2015년 10월 3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5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 경기. 3회 말 2사 만루 때 두산 고영민이 2타점 1루타를 친 후 환호하고 있다.

▲ 고영민 '승리가 보인다'지난 2015년 10월 3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5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 경기. 3회 말 2사 만루 때 두산 고영민이 2타점 1루타를 친 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해 초부터 또 한 명의 야구 스타가 그라운드와의 작별을 선언했다. 두산에서 활약했던 국가대표 2루수 출신 고영민이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1984년생으로 이제 만 32세에 불과한 나이를 감안하면 다소 이른 감이 크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2002년 성남고를 졸업하고 신인 2차 1라운드에서 두산에 지명돼 입단한 뒤로, 고영민은 지난해까지 15시즌 동안 베어스의 유니폼만을 입고 활약해온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다. 입단 이후 첫 4년간은 1군과 2군을 전전하며 간간이 출장기회를 얻는 데 그쳤지만, 김경문 감독이 부임한 이후 2006년부터 두산의 주전 2루수로 발돋움하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06년 116경기에 나서 타율 0.270 14도루 OPS 0.712를 기록하며 성장세를 보인 고영민은 2007년 타율 0.268 12홈런 89득점 36도루, 2008년 타율 0.267 9홈런 84득점 39도루를 기록하며 2시즌 연속 전 경기에 출장했고 명실상부한 리그 정상급 2루수로 발돋움했다. 이 시기 두산은 고영민-이종욱 등 발 빠른 주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달리는 야구로 두산 '육상부'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두산의 발야구 이끈 '육상부' 멤버

빠르고 창의적인 주루플레이와 더불어 고영민이라는 선수의 존재감을 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계기는 그의 개성 넘치는 수비 스타일에 있었다. 고영민은 내 외야를 가리지 않는 넓은 수비범위와 역동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방망이보다 오히려 글러브를 들었을 때 더 돋보이는 독특한 유형의 선수였다.

일반적인 2루수 위치에서 더 외야로 빠져서 공을 처리하는 스타일 때문에 얻은 2익수(2루수+우익수)라는 별칭이나, 도저히 잡기 어려울 것 같은 타구도 시원시원하게 처리해내는 모습이 로봇 팔이 쭉쭉 늘어나는 만화주인공 형사 가제트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얻은 '고제트'같은 별명들은, 모두 고영민의 넓은 수비 범위와 순발력을 강조하는 표현들이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전형적인 교타자를 연상시키지만 타격 스타일은 오히려 장타를 노리는 듯한 풀스윙이 많았고 실제로 가끔 뜬금없이 터지는 한 방도 있었다. 고영민은 규정타석을 채우고 3할을 달성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전성기였던 2007~2008년에도 2년 연속 삼진이 세 자릿수를 넘기며 거포도 아니면서 볼넷보다 삼진이 더 많은 괴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통산 홈런 개수(46개) 자체는 많지 않지만 뜻밖에 한번 터질 때마다 대형 홈런이 꽤 많았고, 심지어 국제대회에서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한 방을 종종 터뜨릴 때가 있었다. 공격에서나 수비에서나 종잡을 수 없는 이런 4차원적인 야구 스타일 때문에 고영민은 전성기에도 영양가와 팀 기여도를 놓고 평가가 자주 엇갈리던 선수였다. 2차 스탯에 민감한 마니아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비공식적인 별명 '고변태'로 통하기도 했다.

올림픽 금메달 확정 짓는 순간 2008년 8월 23일 오후, 중국 베이징 우커송야구장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 한국 대 쿠바 경기에서 고영민이 9회 말 1사 만루에서 1루 주자 알렉세이 벨을 2루에서 아웃시킨 후 1루로 송구해 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아웃시켜 금메달을 확정짓고 있다.

▲ 올림픽 금메달 확정 짓는 순간2008년 8월 23일 오후, 중국 베이징 우커송야구장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 한국 대 쿠바 경기에서 고영민이 9회 말 1사 만루에서 1루 주자 알렉세이 벨을 2루에서 아웃시킨 후 1루로 송구해 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을 아웃시켜 금메달을 확정짓고 있다.ⓒ 연합뉴스


고영민의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은 역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베이징올림픽에서 야구대표팀의 일원으로 9전 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건 장면일 것이다. 고영민은 결승 쿠바전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9회 1사 만루 위기에서 마무리 투수 정대현이 유도해낸 땅볼을 유격수 박진만으로부터 이어받아 다시 1루로 송구하며 한국의 우승을 확정 짓는 마지막 그림 같은 병살플레이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차지했다.

이 장면에는 유명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고영민은 찰나에 우승이 좌우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에도 누구도 예상 못했던 과감한(?) 플레이를 시도하며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간담을 잠시나마 서늘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병살플레이 상황에서 고영민은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 2루를 밟고 선행 주자를 먼저 아웃시킨 뒤 다시 공을 1루에 던져야 했는데, 아직 타이밍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음에도 스텝을 제대로 밟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리며 러닝 스로우로 송구했다. 이 때문에 공이 불안정하게 약간 곡선을 그리면서 들어갔다.

당시 1점 차 만루 상황이었기에 만일 이때 공이 뒤로 빠지기라도 했다면 그대로 2·3루 주자가 모두 들어와 역전패를 당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유격수 박진만과 포수 진갑용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도 뜬금없는 러닝스로우를 감행하는 고영민을 바라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다행히 1루수 이승엽이 안정적으로 공을 처리하며 무사히 승부를 마무리 지었지만 고영민은 경기가 끝나고 동료들로부터 "오늘 너 때문에 졌으면 우리 모두 한국에 못 들어갈 뻔 했다"며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고영민은 이날 쿠바와의 경기 전부터 소속팀 두산에서는 물론이고 이미 베이징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이런 식의 4차원 플레이를 보여준 바 있다. 고영민의 스타일을 잘 아는 또래 선수들이나 팬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인(?) 풍경이었기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짧았던 전성기, 그의 야구인생 2막을 응원한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야구인생의 정점을 찍는 듯했던 고영민이었지만 애석한 것은 전성기가 너무도 짧았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이듬해인 2009년부터 고영민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9년 85경기에서 타율 .235, 2010년에는 100경기 타율 .205, 2011년 93경기 타율 .210에 그치며 늘어난 잔 부상까지 겹쳐 점점 팀 내 입지가 줄어들었다.

부진이 길어지며 한때 고영민을 스타로 만들었던 공격과 수비에서의 장점들은 어느덧 안정감을 떨어뜨리는 약점이 되어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국가대표급 2루수 오재원의 가파른 성장도 고영민의 팀 내 입지 약화를 가속했다.

고영민은 지난 2015년 41경기를 뛴 고영민은 시즌 후 FA자격을 얻었지만 이미 주가가 크게 떨어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팀은 없었다. 결국, 1+1년이라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팀에 잔류했지만 2016년에도 8경기 출전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게 됐다. 고영민은 최근까지 선수생활에 대한 의지를 밝혔지만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두산에서 어느덧 베테랑이 된 그의 자리는 마땅치 않았고 다른 구단 역시 백업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인정했으나 젊은 선수들을 키우는 방향을 기울였다.

고영민은 두산 시절의 옛 은사인 김진욱 감독이 있는 kt 위즈에서 코치로 야구인생의 새로운 2막을 열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이른 나이에 아쉬움을 남기고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야구인생을 개척하게 된 것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10여 년의 프로 경력 동안 그야말로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모두 체험해본 고영민이기에 자신의 경험을 잘살려 후배들에게 좋은 지도자로서 거듭날 수 있다면 이른 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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