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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