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널>은 누가 봐도 세월호 참사였다.

영화 <터널>은 누가 봐도 세월호 참사였다. ⓒ (주)쇼박스


누가 봐도 세월호 침몰 참사다. 모티브부터 세세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영화 <터널>은 세월호의 은유로 가득하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터널과 그 안에 갇힌 생존자, 터널 밖에서 벌어지는 당혹스러운 상황까지가 모두 그렇다. 구조현장에서 사진 찍기에 바쁜 정부 당국자, 지지부진한 구조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사망사고, 다이빙벨을 연상시키는 구조장비까지 작정하고 짜 맞춘 듯한 설정을 마주할 때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세월호 침몰 참사의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어떤 재난 영화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여객선의 침몰과 그 안에 갇혀 스러져간 못다 핀 청춘들, 사고 이후 벌어진 당혹스러운 사건들과 유가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스러운 순간까지. 재난 영화보다 더 재난 영화 같았던 실화는 여전히 진상이 가려진 채 저 깊은 바다 밑 거꾸로 처박힌 배와 함께 스러져가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자동차 딜러 정수(하정우 분)가 무너진 터널 한가운데 갇히며 시작된다. 500ml 생수 두 병에 배터리 잔량이 78% 남은 핸드폰, 그밖에 차에 든 여러 잡동사니가 정수에게 주어진 전부다. 암벽에 팔이 짓눌려 고립된 남자가 로프, 칼, 500ml 생수 한 병을 가지고 127시간의 사투를 벌인 <127 시간>, 관에 갇혀 묻힌 주인공이 라이터, 칼, 핸드폰만 가지고 탈출을 시도하는 <배리드> 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영화는 앞의 두 작품과 결정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127시간>과 <배리드>가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력으로 탈출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면 <터널>의 주인공은 오래 생존하는 데만 집중하고 외부의 구조인력이 주인공의 구조를 전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설정의 차이는 영화가 집중하는 부분이 달라지게 한다. 고립된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 두 영화와 달리 <터널>은 주인공만큼이나 터널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터널 안과 터널 밖, 두 개의 장르를 함께 좇다

 붕괴한 터널 안에서도 유지되는 기아차의 프레임 만큼이나 영화는 믿기 힘든 부분으로 가득하다.

붕괴한 터널 안에서도 유지되는 기아차의 프레임 만큼이나 영화는 믿기 힘든 부분으로 가득하다. ⓒ (주)쇼박스


실제로 <터널>은 터널 안에서 벌어지는 정수의 생존기와 터널 밖의 상황에 거의 절반씩의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스릴러적 재미와 블랙코미디적 풍자를 모두 잡기 위한 선택이다. 상업적 재난 영화와 사회 풍자적 블랙코미디, 얼핏 생각해도 전혀 다른 두 가지 장르를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안에서 모두 살려낸다는 목표는 김성훈과 같은 재능 있는 감독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였음이 분명하다.

러닝타임의 절반을 재난 스릴러로 이끌어가면서도 다른 절반을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한 은유로 그리는 <터널>이 어느 한 쪽을 깊이 있게 묘사해내길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127시간>과 <배리드> 같은 재난 스릴러도 9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필요로 하는데 터널 안에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나는 등 필요 이상의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있는 <터널>이 터널 안 상황을 충실히 구성하기엔 60여 분의 시간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의 부족은 터널 밖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세월호 침몰 참사의 주요 이정표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듯 공무원과 구조대, 여론과 언론, 이익집단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그려내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터널에 갇힌 정수가 119에 신고를 할 때 엿보이는 공무원의 부적절한 대응, 터널을 무너지게 만든 부실공사와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쁜 고위 공무원단의 태도, 지지부진한 구조작업에 지루해하는 여론과 자극적인 보도로 이를 조장하는 언론, 사람의 목숨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이익집단들, 지지부진한 구조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사망사고와 이를 내세워 구조작업을 중단해야 한다며 분탕질치는 악성 종자들까지. 영화는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보여진 일련의 현상을 판박이처럼 스크린 위에 찍어내는데 깊이 있는 드라마와 비판의식은 오간 데 없이 훑고 퉁치듯 풍자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러 주체들이 빚어내는 부조리를 보다 깊이 있게 보여줬다면 수준급 블랙코미디와 현실 풍자 드라마가 될 수 있었지만 영화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구조작업 중에 사고로 사망한 최반장(정석용 분)은 세월호 구조작업에 참여한 잠수부가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세월호 침몰 참사를 판박이처럼 따라가는 영화가 그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감독이 조금이라도 사려 깊었다면 제2터널이 뚫릴 걸 알고 있는 작업반장이 무리하게 구조작업을 진행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정도로 연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엔 처음부터 그 같은 고민이 없었고 세월호 침몰 참사의 궤적을 그대로 좇는 정도에서 안주하고 만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표류하고 다시 유가족이 거리로 나와 단식을 시작한 작금의 상황에서 안이한 희망을 선사하는 결말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영화의 마지막, 구조된 정수는 아내와 함께 다시 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감독은 아내가 두려워하는 정수의 손을 꼭 잡고 터널을 지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 장면은 내게 감독이 세월호 침몰 참사를 소재로 삼은 영화를 만들며 어떤 고민을 했는지 의심하게끔 했다. 현실 속에서 세월호는 여전히 참사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국면을 지나고 있는데 영화는 어째서 이토록 쉬운 희망적 결말을 맞이한 걸까. 극장을 나오며 "다 꺼져 개새끼들아!"하는 일갈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뱃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을 받은 게 오직 나뿐일까. 이 영화를 본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의 트라우마는 과연 그토록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걸까.

안과 밖, 모두에서 실패하다

 구조팀장 김대경(오달수 분)은 터널 밖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의 목격자로 기능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세월호 침몰 참사 가운데서 그와 같이 역할을 다한 공직자가 있었던가.

구조팀장 김대경(오달수 분)은 터널 밖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의 목격자로 기능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는 세월호 침몰 참사 가운데서 그와 같이 역할을 다한 공직자가 있었던가. ⓒ (주)쇼박스


요컨대 <터널>은 터널 안과 밖에서 모두 실패한 작품이다. 영화는 터널의 안과 밖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 집중했어야 했다. 세월호 침몰 참사의 은유가 되고자 했다면 이정표를 훑는 수준의 판박이를 넘어 한국사회에 트라우마를 남긴 참사를 파헤치려는 각오를 가졌어야 했다.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비극을 다루는 최소한의 예의였을 테니까.

반대로 재난스릴러가 되고자 했다면 터널 속에서 정수가 느끼는 결핍과 단절, 절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터널 안에서 수없이 클래식을 들었다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목을 맞추는 정수의 모습을 보여줄 게 아니라 관객들로하여금 터널 안에서 정수와 함께 음악을 듣는 경험을 공유하게 했어야 했다. 정수가 터널 속에서 숱하게 들었을 그 곡들 가운데 적어도 한 곡쯤은 관객에게 들려줘야 했다.

물이 부족하다며 물병에 눈금을 긋고 소변을 받아마시려는 장면으로 퉁치는 대신 목마름을 견뎌내는 고난의 순간을 수없이 삽입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야 마땅했다. 외부와 연결이 끊긴 뒤 별다른 자극도 없이 버텨야 했던 정수가 그 외로움과 적막함 가운데 온전히 놓였던 순간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래서 그가 느끼는 고통과 절망을 관객이 조금이나마 공유하도록 했어야 했다. 저 <그래비티>와 <타이타닉>에서 극한의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바라보며 관객들이 함께 숨을 참았던 것처럼, 그런 순간을 느끼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터널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50대 50으로 나눠 풀어가는 편을 택했다. 안이한 선택이었다. 터널 안은 숨죽여 지켜볼 만큼 충분히 처절해지지 못했고 터널 밖은 현실세계에서 통용될 어떤 유효함도 확보하지 못했다. 쉬운 재난영화와 겉만 핥는 블랙코미디가 됐다. 당연한 결과다.

<터널> 밖 현실은 영화보다 가혹하다

 오달수보다 더한 신스틸러 탱이. 탱이의 등장은 정수의 생존을 예고하는 복선이 된다.

오달수보다 더한 신스틸러 탱이. 탱이의 등장은 정수의 생존을 예고하는 복선이 된다. ⓒ (주)쇼박스


터널 붕괴의 유일한 희생자, 미나의 부모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과 마찬가지로 분노했을 게 분명한데 그 분노는 대체 영화의 어디에 놓여있는가. 그 같은 분노를 외면하고 절반의 장르성과 절반의 풍자에 만족한 이 영화가 과연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다룰 자격이 있는가.

터널 안에서의 부족한 시간에도 영화가 미나라는 캐릭터를 소모하는 방식은 또 얼마나 쉬웠나. 그 부족한 러닝타임을 소모하면서까지 물을 나눠주는 장면을 삽입해야 했다면, 죽음에 임박한 이에게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낮추면서도 물을 나눠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하는 결단의 순간으로 연출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를 선심 쓰듯 물을 주는 모습 정도로 보여준 건 이 에피소드가 어째서 필요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끔 한다.

미나가 기르는 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앞서 정수의 딸이 정수에게 개를 사달라고 졸랐으므로, 관객들은 정수가 개와 함께 살아날 것임을 예견하게 되는데 이토록 쉽고 뻔한 장치 역시 이 영화에 필요했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들어간 작가의 고민이 고작 이 정도였기에 관객들은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고통받는 주인공을 보며 팝콘과 콜라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 세월호가 여전히 인양되지 못한 채 진도 앞바다에 거꾸로 처박혀있고 유가족은 다시 거리로 나와 단식을 시작한 작금의 상황에서, 터널을 지나는 생존자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는 감독의 선택을 안이하게 느낀다면 그것을 과연 과도한 감상이라 할 수 있을까.

기억하자. 우리의 현실은 영화보다 가혹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터널 (주)쇼박스 김성훈 하정우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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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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