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1987년 영국 콘월, 폭풍우가 몰아치는 수요일 밤. 블랙록 등대의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는 오늘도 홀로 등대를 지킨다. 빗물을 털고 들어온 그는 몸을 덥히기 위해 난로에 불을 지피려고 하지만 마지막 남은 성냥이 젖어 쓸모가 없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럼주를 들이붓는다. 모포를 둘둘 만 채 소파에 앉아 몸을 녹이려는 그. 라디오를 켜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노래를 듣는다. 아이작은 옛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 로웬나에게 불러주었던 그 노래를 감상하며 잠을 청한다. 하지만 날씨 탓에 라디오 주파수는 일정치 않고, 갑자기 노래가 끊긴다. 라디오에서 더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작의 귀에는 노래가 계속 들린다. 아이작은 노래의 출처를 찾아 헤매다 등대 밖으로 뛰어나간다.

급하게 뛰쳐나간 아이작은 실신한 여성, 모보렌을 안고 블랙록으로 돌아온다. 몸이 너무 찬 그녀를 구하기 위해 육지로 급히 SOS를 보내지만, 이 날씨에는 구조정이 뜰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애타게 무전기를 쥐고 있던 그는 깨어난 그녀를 마주하며 이 밤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동시에,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과거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 A에서 개막한 연극 <사이레니아>는 이처럼 급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카포네 트릴로지>를 잇는 '밀폐'의 매력

연극 <사이레니아> 공연 사진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A에서 개막하는 연극 <사이레니아>는, 1987년 폭풍이 몰아치던 영국 블랙록 등대에서 벌어진 등대지기 실종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가 실종되기 21시간 전으로 돌아가 비좁은 등대 현장을 무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높은 긴장감과 몰입감을 유지한다. 오는 8월 15일까지.

▲ 홍우진 아이작 아이작은 술을 마신다. 3주에 한 번, 생필품 보급을 위해 마을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마을 사람들과 잘 마주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안 갈 때가 잦다. 마을 사람들은 자꾸만 무엇을 물어보려고 한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도, 그 8년 전 과거의 죄책감을 자꾸 상기시킨다. 그러니 럼주가 없으면 잠을 청할 수가 없다. ⓒ 스토리피


<사이레니아>의 원작자 제스로 컴튼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관련 기사 : '19금' 연극, 무대는 렉싱턴 호텔 661호). 100석으로 한정됐던 <카포네 트릴로지>보다도 적은, 단 30명의 관객만 블랙록 등대에 입장할 수 있다.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운 채 깊은 몰입감을 유도하는 특유의 서스펜스가 이번에도 돋보인다.

라이선스 과정에서 20분짜리 단막극이 70분으로 연장되었지만, 여전히 '짧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긴박감이 넘친다. 배우의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좁은 이 공간을 매력적인 디테일들이 꽉 채운다. 극도로 빛이 절제된 등대 안은 물리적 어둠을 심리적 어둠으로 연결 짓는다. 마지막 구조요청을 남기고 사라진 아이작의 21시간을 추적하면서.

연극 <사이레니아> 공연 사진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A에서 개막하는 연극 <사이레니아>는, 1987년 폭풍이 몰아치던 영국 블랙록 등대에서 벌어진 등대지기 실종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가 실종되기 21시간 전으로 돌아가 비좁은 등대 현장을 무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높은 긴장감과 몰입감을 유지한다. 오는 8월 15일까지.

▲ 모보렌 그리고 로웬나 <사이레니아>는 8년 전 로웬나와의 행복했던 시절과 1987년 현재를 오간다. 아이작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모보렌 때문에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 당시 추억이 행복했던만큼, 지금의 불행은 더욱 깊어진다. ⓒ 스토리피


연극 <사이레니아> 공연 사진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A에서 개막하는 연극 <사이레니아>는, 1987년 폭풍이 몰아치던 영국 블랙록 등대에서 벌어진 등대지기 실종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가 실종되기 21시간 전으로 돌아가 비좁은 등대 현장을 무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높은 긴장감과 몰입감을 유지한다. 오는 8월 15일까지.

▲ 전경수 모보렌 극 중 모보렌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설정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녀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정체 역시 모호하다. ⓒ 스토리피


<사이레니아>가 관객을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이라이트는 모보렌의 갑작스러운 자기고백 장면이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이 커진 그 순간, 모보렌은 자신의 목걸이를 꺼내보이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마치 영화 <곡성>의 무명이 종구를 붙잡고 얘기하는 것처럼. 스릴러에서 오컬트로 넘어가는 이 포인트가 다소 성기고 어색하지만,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과거로 침잠하는 그 묘한 맛이 극의 깊이를 더한다.

대체 이 여성, 모보렌의 정체는 무엇일까? 죽음? 폭풍? 바다? 죽은 로웬나? 아이작을 짝사랑한 바닷가 소녀? 신화 속의 세이렌? 연극은 그녀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와 복선을 배치할 뿐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사실일 수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믿기 어려운 진실일 수도 있고, 아픈 그녀가 마음대로 만들어 낸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녀의 말이 아이작의 귀를 홀렸고,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아이작의 배 이름이기도 한 '사이레니아'는 명사 사이렌(Siren)에 지역을 의미하는 접미사 이아(ia)가 붙은 이름이다. 경보를 뜻하는 사이렌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Seiren)이다. 노래로 선원들을 홀려 배를 침몰케 하고, 그들을 바다 속으로 끌고 가는 마녀. 블랙록 등대가 자리한 그 섬은 어쩌면 세이렌의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이렌에 홀린 그 생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했다


연극 <사이레니아> 공연 사진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A에서 개막하는 연극 <사이레니아>는, 1987년 폭풍이 몰아치던 영국 블랙록 등대에서 벌어진 등대지기 실종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등대지기 아이작 다이어가 실종되기 21시간 전으로 돌아가 비좁은 등대 현장을 무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높은 긴장감과 몰입감을 유지한다. 오는 8월 15일까지.

▲ 아이작의 노래 모보렌은 아이작이 부르는 노래가 자신을 향해 부르는 건 줄 알았다. 실은 로웨인을 위한 노래였지만…. 그래서 그토록 그녀는 아이작의 노래에 집착한다. 그의 노래를 들은 모보렌은, 이제 그를 바다로 끌어들일 준비를 한다. ⓒ 스토리피


등대지기 아이작은 파도에 휩쓸려 온 모보렌을 마주하며,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로웬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구하고야 말겠다고 그 좁은 등대 안에서 발악한다. 수시로 무전기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지하의 발전기를 고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거대한 재해 앞에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너무도 작았다. 희망은 보일 듯 하면서 그 앞에서 자꾸만 사라진다. 간신히 연결된 듯한 무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끊어지고, 겨우 찾은 마지막 마른 성냥은 허무하게 꺼져버린다.

아이작은 끊임없이 자책한다. 밤마다 자신을 힐난하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로웬나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받을 사람 없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먹구름을 보지 못한 것도, 배가 뒤집힌 것도, 물에 빠진 로웬나를 구하지 못한 것도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홀로 돌아온 그는 로웬나 아버지의 눈빛에서 '너가 죽었어야지'를 읽어야만 했다.

생존은 죄가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혹은 위기가 닥쳤을 때,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건 본능이다. 누군가의 어쩔 수 없는 불행(어쩌면 죽음) 앞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그 앞에서 실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극도로 제한적이다. 아이작이 로웬나를 위해 다시 바다로 뛰어들지 못했던 것처럼, 모보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럼주를 나눠주고, 모포를 덮어주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게 최선이었다. "모든 순간, 인간은 자신의 최선을 고른다"는 대사처럼.

살아남은 자를 희생양 삼아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죄의식을 벗는 건 참 쉽다. 환향녀에게, 위안부에게 쏟아졌던 그 비난의 심리가 영국 콘월에서 그대로 반복된 것뿐이다. 로웬나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편하게 아이작에게 모든 죄를 전가했다. 3주에 한 번 먹을 것과 술을 사러 마을에 가는 게 다인 아이작. 그는 스스로를 블랙록 등대에 가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지난 8년간 그를 가둔 건 그를 배척하고 몰아세운 마을 전체였다.

그렇게 구조나 집단의 책임은 사라진다. 세월호가 선장 개인의 책임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이 그 죄를 벗는 것처럼, 강남역 사건이 어느 정신병자 한 명의 문제가 되는 순간 남성들이 반성할 게 없어지는 것처럼. 하지만 남은 사람은 어쩌랴. 세월호 의인 김동수는 자살을 시도했고, 강남역 사건 피해자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었던 죽음 앞에 오열했다.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나가려던 아이작은, 모보렌의 설득에 이끌려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기로 한다. 자신을 지난 8년간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살아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한 그.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이 공간조차도 자신이 모보렌과 함께 사라지고 나면 무사할 것이다. 아이작은 이제 죽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사이레니아>는 로웬나가, 아이작이, 모보렌이 불렀던 그 노래처럼 어둡고, 슬프고, 아름다운 연극이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세이렌의 노랫소리 뒷맛이 씁쓸한 건, 죽기 위해 심연으로 걸어가는 아이작의 등을 아무도 붙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죽음을, 방기했다.

연극 <사이레니아> 콘셉트 연극 <사이레니아>의 콘셉트 이미지. 폭풍이 몰아치는 밤, 등대지기 아이작 다우어 혼자 지키던 블랙록 등대에 정체모를 여인이 당도한다. 그녀의 이름 모보렌.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아이작은 애써 떨쳐버리려 했던 과거와 다시 마주한다.

▲ 연극 <사이레니아> 콘셉트 이미지 지난 14일, 서울 대학로 TOM연습실 A에서 개막한 연극 <사이레니아>는 그렇게 섬세한 극이 아니다. 하지만 거친 파도처럼 힘이 있고, 세이렌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극이다. 불친절한 동선, 배우의 표정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조명, 명쾌하지 않은 이야기 등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연극 마니아라면 한 번은 반드시 봐야 한다. 그정도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오는 8월 15일까지. ⓒ 스토리피



연극 사이레니아 아이작 모보렌 세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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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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