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잘 나갈 때보다 어려울 때 진면목을 드러낸다고 한다. 사랑이나 우정도 마찬가지다. 승승장구할 때는 달콤한 찬사를 늘어놓고, 위기에 처했들 때 손가락질하거나 외면하기는 쉽다. 그러나 때로는 애정어린 쓴소리도 필요하다면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힘들 때 말없이 어깨를 빌려줄 줄 아는 게 진정한 믿음이다.

프로축구 전북 현대는 최근 심판 매수 논란으로 구단 창단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최강희 전북 감독과 이철근 단장이 사임할 수도 있고, 연맹의 징계가 내려지면 승점 삭감이나 2부리그 강등같은 중징계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팬들도 멘붕에 빠지기 마련이다.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팬들이 흔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 구단의 행태에 실망하여 분노하고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태도다.

심판 매수 스캔들, 정도를 지킨 전북 팬들

 전북현대 응원단이 24일 오후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멜버른과 가진 아시아챔피언스 리그 16강전의 2-1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전북현대 응원단이 24일 오후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멜버른과 가진 아시아챔피언스 리그 16강전의 2-1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다수의 전북 팬들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팀의 위기를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으며 정도를 지켰다. 지난 24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6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16강 2차전에서는 무려 1만2000명이 넘는 전북 팬들이 홈구장을 찾아 자신들의 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전북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들의 뜨거운 응원 구호 역시 변함이 없었다.

최근 벌어진 논란으로 인해 생긴 적지않은 실망과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출 수 없는 전북과 축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보여준 장면이다. 흥행 실패를 우려했던 전북 관계자들도 예상밖의 성원에 놀라고 감동한 모습이었다. 전북은 팬들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하듯 멜버른을 2-1로 제치고 ACL 8강에 진출했다.

그렇다고 이날 경기장의 응원만 가지고 전북 팬들이 맹목적으로 구단을 옹호하는 데만 급급하다고 할 수는 없다. 전북 팬들은 오히려 8개 전북 서포터스 연합 M.G.B(매드 그린 보이스) 성명으로 이미 ACL 경기 전부터, 구단에 이번 심판 매수 사태에 대한 엄중한 대처를 당부하기도 했다.

전북 서포터즈는 지난 24일 "구단은 이번 사태를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해서는 절대 안되며,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철저한 내부 조사와 책임규명 할 것을 요구한다" 며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사태가 흐지부지 덮힐 조짐을 보일 경우 팬들이 먼저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프로연맹도 민감한 사안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단체같은 제3자도 아니고 어찌보면 구단의 가장 열렬한 지지세력을 대표하는 서포터즈에서 자발적으로 이런 요구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물론 일부 팬들의 경우, 구단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입장을 통해서는 일방적인 편가르기나 제 식구 감싸기에만 급급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는 전북 구단의 상대적으로 궁상맞은 대응과도 비교가 된다. 전북은 심판 매수 논란이 알려진 직후부터 해당 스카우트의 개인적 과실이라는 선긋기에만 급급한 행태로 팬들의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심지어 수장인 최강희 감독과 이철근 단장도 뒤늦게 '책임'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작 구단의 수뇌부로서 구단 직원의 심판매수라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동안 사전에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점에서 무책임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전북을 넘어선 축구에 대한 사랑

사실 아직도 K리그 서포터 문화하면 종종 비이성적이고 과격하거나 맹목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일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구단이나 K리그에 대하여 부정적인 문제제기가 나오면 '축구 죽이기'식의 음모론이나 감정적인 반응으로 대처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서 이번 전북 팬들의 이성적이면서도 성숙한 대응은 더 의미가 깊다.

오랜 세월에 걸쳐 K리그를 선도하는 구단으로 성장해 왔다는 자부심을 가진 전북 팬들에게 이번 사태는 누구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 진상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카우트의 개인적 과실'이라는 구단의 순진한 해명을 그대로 믿고 싶은 유혹이 들 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외부에서 전북 사태를 바라보는 다수의 일반 대중과 축구팬들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의 성숙한 전북 팬들도 특정 구단만을 지키기 위한 홍위병이 되는 대신, '축구를 사랑하는 팬'이기를 택했다.

그들은 구단에 대한 일방적인 애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심판 매수나 승부조작같은 악습을 단호히 근절하고 스포츠 문화를 바로 세우는 길임을 분명히 자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뼈를 깎아내는 고통도 참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정이다.

일부 팬들은 홈페이지와 SNS 릴레이 등을 통하여 "이번 사태로 전북이 설사 강등같은 최악의 징계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경기장을 찾아 전북 축구에 대한 성원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팀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지만, 팬들 스스로가 이번 사태를 통하여 전북이 그에 합당한 중징계를 받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더 의미가 있다. 그저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욕하거나 혹은 감싸기만 하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용기다.

전북에게 있어서 이번 심판매수 논란은 구단 역사상 가장 아픈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귀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전북이 지난 10년간 명문구단이 되기 위하여 공들여 쌓아온 노력과 시행착오가 그저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증거가 바로 지금의 성숙한 전북 팬들이기 때문이다. 전북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유산은 4번의 K리그 우승 트로피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팀과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팬들이었다.

팬들의 이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전북 구단과 프로연맹을 비롯한 한국 축구계는 이번에도 심판 매수와 승부조작 논란을 최소한의 범위로 축소시켜서 조용히 처리하는데만 급급한 느낌을 준다.  축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업인들보다, 오히려 축구를 사랑하는 아마추어 팬들의 인식이 더 앞서 나가고 것은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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