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의 포스터.

영화 <곡성>의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당신은 믿었는가, 믿지 않았는가. 아니, 당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정교하고 세심한 듯 보이면서도 친절한 듯 불친절한 이미지와 상징의 연쇄를 견뎌낼 것인가, 적극적으로 추리해낼 것인가. 아니, 당신이 정확히 본 것은 무엇인가. 다시,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무수한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영화 자체는 꽉 짜인 구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이하게도 관객들은 질문하고 또 질문을 해야만 한다. 결말 또한 일반적인 열린 결말과도 전혀 다른 층위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관객이나 평자 각각이 영화를 놓고 벌이는 해석의 지평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영화의 헤드카피와 영화 속 설정처럼 관객에게 "미끼를 물었다"는 쾌감 혹은 불쾌감을 던져주려 했다면, 나홍진 감독은 확실히 성공했다. 하지만 156분이란 긴 상영시간 끝에 다다른 결론이 "so what?"이라든지, 개별 시퀀스가 전하는 장르영화적인 쾌감의 향연에 그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아무리 피해자의 감정을 쫓아가려 하는 주제나 오컬트와 공포 장르의 한국적이고도 1차원적 변형, 한국을 넘어서는 아시아적인 종교관과 서구 기독교적 클리셰의 결합과 충돌이라는 기교가 넘실거린다 해도, 그 의미망은 우리가 본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야심차지만 공허하고, 둔중하지만 진중하진 않다.

당신이 마주할 의심의 실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보고 있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고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나를 만져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살과 뼈가 있느니라."

누가복음 속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에게 "기쁨 속에서도 믿지 못하고 놀라는" 성경구절의 인용 자막으로 <곡성>은 시작한다. 연이어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이 던지는 낚시 상 미끼가 강조된다. 장면 그대로의 미끼. 나홍진 감독은 그 미끼가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이자, 이 곡성이란 공간을 지배하는 의심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또 역설한다.

그 미끼를 문 피해자는 먼저 지역 경찰 종구(곽도원 분)다. 집단 야생 버섯 중독이라 (후에) 미디어를 통해 명명된 의문의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종구는 자의반 타의반 괴기스런 소문의 주인공인 외지인을 의심하게 된다. 그 의심을 키우게 만드는 인물 중 하나가 도무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여성 무명(천우희 분)이다. 그 와중에 초등학생 딸 효진(김환희 분)이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서 종구의 의심은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게 되고, 그래도 딸에게 차도가 없자 급기야 잘 나가는 무당 일광(황정민 분)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곡성>의 의심은 차곡차곡 쌓여 심연을 마주하게 만들기보다 즉물적이고 동원된 성격이 짙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상상신이나 종구의 꿈(인듯 현실인듯 모호하게 재현된) 장면이 대표적이다. <곡성>은 그렇게 관객 역시 끊임없이 외지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즉자적인 장면과 설정을 중후반까지 곳곳에 심어 놓는다. 외지인이 통역을 거쳐야 하는 일본인이기에, 종구가 외지인과 대면하는 장면 역시 그러한 의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런 구조 내에서, 곡성이란 장소는 종구(와 지역민들)의 운명적인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 의심을 강화시키는 손쉬운 배경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야생성과 반지성과 오컬트의 작동 방식이 공존해도 무방해 보이는 공간의 탄생인 셈이다. 더불어 서구인의 시선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이고, 샤머니즘이 구현되기에 무리가 없는 한국적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장르적 공간이랄까.

이와 더불어 종구를 포함한 모든 지역민들은 그 의심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곡성>이 마련하는 그 의심이란 장치에 복무하기에 바쁜 존재들이다. 지방 시골의 공간 선택과 홍경표 촬영 감독의 자연 풍광을 담은 경탄할 만한 촬영이 겹쳐지면서, 그러한 장르적인 장치들과 감정들 역시 증폭된다. 중반부 일광의 굿 장면은 그 절정이다.

문제는 중반부까지 쌓아올린 이 의심의 탑과 장르적 야심이 중후반부의 선택적인 편집의 불친절과 결합해 영화를 불균질하게 만드는 동시에 주제까지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그것조차 나홍진 감독의 철저한 선택의 결과라 보이지만.

나홍진 감독 특유의 절정까지 밀어붙이는 연출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곡성>은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무명(천우희 분)의 존재를 철저히 이야기 구조 외부에 위치시킨다. 대신, 대사가 일천한 외지인과 황정민이란 배우가 더 부각되는 일광만이 지속적으로 교차된다. 같은 의심, 다른 균형감. 일광의 존재는 적극적으로 과시된다. 외지인의 정체는 끊임없이 지연된다. 반면 무명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존재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나홍진 감독은 대상이 다른 두 가지 의심의 실체를 종구에게만은 끝까지 숨기는데 주력한다. 아니, 이 형식적 쾌감에 경도된 듯 보인다. 감독의 전작 <추격자>나 <황해>는 "관객은 알고, 주인공은 모르는" 이야기 구조의 긴장감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바 있다.

하지만 <곡성>은 이러한 특성이 오컬트란 장르성과 의심과 피해자성이란 주제와 만나면서 모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흩뿌려진 단서와 '맥거핀'이라는 거대한 낚시 효과 속에 허우적대는 종구와 관객들이야말로 미끼를 물은 셈이다. 그리하여, 피해자로 선택된 종구와 종구의 딸만이 고통 속에 신음한다.

그 안에서 어떤 장면들은 종종 과장돼 있고(대표적으로 좀비에 버금가는 피해자와의 액션이나 딸의 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묘사), 어떤 장면은 터무니없이 감상적이며(딸과의 즐거웠던 한 때), 무엇보다 외지인의 실체를 그 의심과 결합하는 절정부는 너무나 정직해서 오히려 1차원적이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부인'을 연상시키는 결말부도 종교적이라기엔 너무나 기계적이고 직설적이다. 마치 누가복음 속 제자들의 의심을 악의 근원으로 실체화시키는 절정 장면이 직접적이라 그 의미를 스스로 협소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치 설정은 창대했으나 결말까지 다다르는 의미의 연쇄망이 종종 비어 보인다고 할까. 피할 수 없는 악을 마주한 피해자들이 왜 신음하는가에 대한 물음 역시 감독이 선택한 형식과 방법론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감독의 전작을 뛰어넘는 흥행이 점쳐지는 <곡성>은 일부 영화팬들로부터 적극적인 해석과 추리를 불러일으키는 화제작으로 남을 전망이다. 개별 장면들의 영화적인 쾌감과 그 연쇄에서 오는 몰입도는 분명 여느 한국영화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컬트 장르에서 기인하는 취향의 문제나 나홍진 감독 특유의 감정을 절정까지 밀어붙이는 연출은 벌써부터 관객들의 논쟁과 호불호를 낳고 있다.

우리는 <곡성>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봐야 하는가. 이미 관람한 관객이라면, 당신이 본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곡성>이 영화 속 주제인 인간의 의심까지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이리라. 한 편으론 탁월하고, 한 편으론 더없이 공허하다.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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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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