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부터 광해군 대에 활동했던 허균은 당대의 개혁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적인 체제는 문제점을 드러냈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유재론>이나 <호민론> 같은 글을 통해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백성을 핍박하면 아래로부터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역적 혐의를 받고 목숨을 잃은 허균의 못다 이룬 바람은 그가 쓴 <홍길동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분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탐관오리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율도국이란 이상향을 꿈꾸었던 <홍길동전>은 급진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사회 소설이었다. 서얼 출신의 홍길동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뜻의 '활빈당'을 조직하여 못된 벼슬아치들의 재물을 빼앗는 <홍길동전>. 이 소설은 변화를 열망하던 민초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의로운 도적으로 칭송받던 홍길동은 이후 영웅의 대명사로 자리 잡으며 계속 사랑을 받았다.

2016년, 다시 대중 앞에 나선 <홍길동전>

현재 홍길동의 활약상은 소설을 벗어나 만화, TV 드라마, 영화로 범위가 넓어졌다. 신동헌 감독이 동생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홍길동>(1967)은 한국 최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발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돌아온 영웅 홍길동>(1995)이 나오기도 했다. 김청기 감독이 심형래, 김정식, 이창훈, 이봉원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과 의기투합한 <슈퍼 홍길동> 시리즈는 1980~1990년대에 걸쳐 8편을 쏟아 냈다. TV 드라마 <홍길동>(1998)이 고전적인 서사에 충실했다면, <쾌도 홍길동>(2008)과 영화 <홍길동의 후예>(2009)는 새로운 스타일과 재해석을 가미했다.

단편 영화 <남매의 집>(2009)과 장편 영화 <짐승의 끝>(2011), <늑대소년>(2012)을 연출한 조성희 감독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홍길동'을 내놓았다. "개성 넘치는 한국적인 영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생각은 <홍길동전>에 눈길을 돌리게 했다. 그는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아래 <탐정 홍길동>)에서 <홍길동전>의 서사를 일부는 인용하고, 어떤 부분은 덜고, 어느 대목은 자신의 화법으로 썼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익숙한' 홍길동은 반 영웅적인 성격과 할리우드 하드보일드 탐정 스타일이 덧칠된 '새로운' 홍길동으로 거듭났다.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은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리고 그 점을 진부함이 아니라 매력 포인트로 승화시켰다.

▲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은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리고 그 점을 진부함이 아니라 매력 포인트로 승화시켰다. ⓒ CJ엔터테인먼트


1980년대 어느 시간대에 발을 딛고 어둠 속에서 독백을 읊조리는 홍길동(이제훈 분)은 불법 흥신소 활빈당의 수장이자 사립 탐정이다. 그는 세상을 괴롭히는 악당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며 정의를 실현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적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박근형 분)을 쫓으며 복수심을 불태운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김병덕의 손에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충격은 8살 이전의 기억과 감정 인지 능력을 빼앗아 갔다. 탐정 홍길동은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말한다.

<탐정 홍길동>은 인물과 시대, 스타일은 달라졌으나 여러 부분을 <홍길동전>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의적 홍길동'과 '탐정 홍길동'은 과거의 아픔을 지닌 자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복수의 사슬을 끊고 미래로 나아가는 점도 비슷하다.

조성희 감독은 어떤 공간에 놓인 인물이 괴물과 만나는 특별한 상황을 줄곧 활용했다. <짐승의 끝>은 신화적인 색채가 풍기는 낯선 공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 마치 욕망·기억·선택·믿음·배신 등 추상적인 요소가 실체화된 괴물과 마주했다. <늑대소년>은 순수와 야만의 경계에 놓인 동화 같은 공간에서 망각이라는 괴물, 낯선 존재라는 괴물, 비정상을 억압하는 괴물을 건드렸다. 1960~1970년대 군부 독재의 그늘이 여전히 깊이 드리운 1980년대를 이야기하는 <탐정 홍길동>에서도 괴물은 다양한 형상으로 출몰한다.

허균의 메시지 그리고 조성희의 메시지

홍길동과 강성일 강성일이 속한 광은회는 마치 하나회를 연상시킨다. 시대적 배경 속에 현실 비판 코드를 잘 섞었다.

▲ 홍길동과 강성일 강성일이 속한 광은회는 마치 하나회를 연상시킨다. 시대적 배경 속에 현실 비판 코드를 잘 섞었다. ⓒ CJ엔터테인먼트


아버지와 강성일(김성균 분)이 속한 조직 광은회는 잘못된 신념이 잉태한 괴물이다. 그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진압 과정을 연상케 하는 사건을 일으켜 공안 정국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 <탐정 홍길동>은 흡사 군사조직 '하나회'를 투영한 것 같은 인상의 광은회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는 행동과 믿음만이 옳다는 판단 아래 폭력마저 정당화하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비판한다. 그릇된 신념은 괴물과 다름없다.

홍길동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한다. '복수'라는 괴물의 욕망에 사로잡혔던 홍길동은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였다. 타인과 함께하지 못하고, 타자로 존재하던 홍길동은 원수 김병덕의 손녀인 동이(노정의 분)와 말순(김하나 분)과 지내며 잃어버렸던 감정을 회복한다.

<짐승의 끝>에서 펼쳐진 어두운 내일의 '길'은 <탐정 홍길동>에서 밝은 내일의 '길'로 펼쳐진다. <늑대소년>에서 갇혀 있던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던 장면처럼 <탐정 홍길동>은 말순을 구하기 위해 광은회의 '문'을 과감히 연다. 이것은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여는 행위이고, 기억을 잃은 채로 감정을 상실했던 홍길동이 정체성을 회복하며 괴물의 처지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 취급받았던 허균. 하지만 그는 <홍길동전>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항민'과 알고 있으나 수동적인 '원민'에서 벗어나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라는 '호민'을 구체화하며 시대의 모순이란 괴물과 맞서는 용기를 설파했다.

이것은 <탐정 홍길동>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깨닫는 탐정의 여정으로 탈바꿈했다. 익숙해진 틀을 깨고 다른 시각에서 고전을 보자는 내용을 담은 <파격의 고전>의 저자 이진경은 "작품들을 가능한 뜻밖의 작품으로 만나게 하고, 약간의 당혹 속에서 정말인지 확인하고자 다시 그 작품을 찾아 읽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탐정 홍길동>은 여기에 딱 어울리는 '파격'이다. "내가 누군지, 적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는 홍길동의 각성은 허균이 염원했던 깨달음의 같으면서도 다른 판본이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의 포스터 허균의 <홍길동전>이 조성희 감독의 손에 의해 2016년 판본으로 재탄생했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원전으로부터 가져올 것은 가져오고, 바꿀 것은 바꾼 신선한 작품이다.

▲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의 포스터 허균의 <홍길동전>이 조성희 감독의 손에 의해 2016년 판본으로 재탄생했다.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은 원전으로부터 가져올 것은 가져오고, 바꿀 것은 바꾼 신선한 작품이다.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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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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