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관객들이 이미 겪었기 때문일까. 그 대단한 배트맨보다 슈퍼맨이 더 강할 것이라고 머릿속에서 기대가 부풀었기 때문일까.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Batman v Superman: Dawn of Justice, 2016)>의 개봉 직후 관객의 반응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듯하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만난 영화인데도 찬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섣불리 영화를 재단하거나 포장하며 혹독한 평을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이 아쉬운 점을 짚어볼 순 있을 테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나름의 매력 또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스포일러, 그러니까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빈약한 악당 캐릭터, 결국 단조로운 이야기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스틸컷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스틸컷. 배트맨과 슈퍼맨을 같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다. 그 결과물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영화 <다크나이트>가 찬사를 받은 이유는 다양했다. 배트맨이 고담시의 '흑기사'가 되기로 마음먹는 이유, 시종일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줄거리, 한스 짐머의 웅장한 음악까지. 이런 요소들이 결집하는 순간, 영화는 하나의 걸작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조커'였다. 극 중에 등장하는 여러 악당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인물인 조커는 영화의 핵심과 같았다. 끊임없이 주인공인 배트맨의 약점을 파고들며 심리전을 펼치는 조커야말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야기를 끝없이 펼쳐낼 수 있게 만든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했지만, 조커가 몇 차례나 되풀이하며 다른 버전으로 '흉터가 생긴 이유'를 말하는 장면을 포함해서.

B급 감성의 첩보 액션 영화 <킹스맨>을 다른 예로 들어보자. 물론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읊조리며 독특한 장비와 액션을 선보인 주인공 '킹스맨'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영화 <킹스맨>이 독특했던 큰 이유는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 때문이었다.

<킹스맨>의 악당 발렌타인은 '지구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인류 말살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지구 온난화가 결국 '한계치를 넘어선 인구'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발렌타인은 '인류 대다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계기는 순전히 '악한 마음'보다 '초인적인 지식'과 '잘못된 방식'의 결합에 가까웠다.

그뿐 아니라, 발렌타인은 '살인'을 즐기지도 않았고 주인공에 총을 겨눈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계획을 실토한 뒤에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역전당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첩보물의 진부한 상황극'을 대사로 비꼬면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악당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악인' 캐릭터를 재치있게 뒤틀면서 새로움과 재미를 선사한 사례였다.

반면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악당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와 괴물 '둠스데이'는 어땠나.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 특유의 깐죽거리는 말투는 분명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그걸로 '퉁'치기에는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 빈약했다. 괴성과 함께 도시를 파괴하는 덩치 '둠스데이'는 전형적인 '돌연변이 괴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이야기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배트맨'과 '슈퍼맨'이 나온다, 그것도 동시에!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스틸컷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스틸컷. DC 유니버스의 트리니티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의 모습이 보인다. 이번 작품의 최고 성과 중 하나는 원더우먼의 가능성이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앞서 '혹독한 평을 할 이유는 없다'고 했으면서도 '이거 혹독한 평 아니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아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도 꽤 다양하기 때문이다.

일단 영웅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흔하게 접해봤을 '배트맨'과 '슈퍼맨'을 볼 수 있다는 점 자체로도 큰 매력이다. 그것도 둘이 동시에 나온다! 혹독한 희생이 뒤따를 것을 알면서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을 기꺼이 보고야 말겠다는 관객이라면, 둘이 한 영화에서 나오는 것도 모자라 서로 치고받고 싸운다는 데 이걸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당연히 '박 터지는' 액션도 나올 테니까 말이다.

거기에 '원더우먼'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겉모습이 아니라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상당하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남성 영웅 중심의 독립작이 꾸준히 나오는 데도 여성 캐릭터 '블랙 위도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왜 없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속 원더우먼의 '강력한 존재감'을 보면, 언젠가 여성 히어로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를 <원더우먼>의 리부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또한 DC코믹스에 등장하는 다른 영웅들, '플래시' 등을 비롯한 인물에 관한 '떡밥'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누군가 <다크나이트> 시리즈에 비해 배트맨이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크나이트>의 웅장함도 시리즈의 조용한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부터 차근차근 밟아왔던 것을 되돌아보자. <어벤져스>도 <아이언맨>과 <퍼스트 어벤져><인크레더블 헐크>부터 천천히 쌓아왔기 때문에 흥행한 영화였다. 그에 비해 아직 배트맨과 슈퍼맨은 갈 길이 멀다. 조금 더 기다려 볼 이유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시동 걸기 시작한 '저스티스 리그', 부디 '급발진'은 아니길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중 한 장면.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중 한 장면. 둠스데이의 캐릭터가 너무 쉽게 된 경향이 있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에 등장하는 배트맨과 슈퍼맨은 '데드풀'이 아니었다. 막 나가는 문제아 캐릭터가 아니고, 결국 모두가 아는 그 배트맨과 슈퍼맨이라는 뜻이다. 그 배트맨을 다르게 보여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있었지만, 잭 슈나이더가 보여주려는 건 아무래도 이와 다른 세계 같다.

<아이언 맨> 등 마블코믹스 원작의 영화가 각각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시리즈의 등장인물이 모여서 결성한 팀 <어벤져스>가 지난 2012년에 드디어 등장했다. 지난 2015년에 개봉한 <어벤져스 2 : 울트론의 시대>로 관객들이 마블 영웅의 모임에 환호하기까지 세어보면 2008년부터 무려 7년이나 걸린 셈이다.

지지고 볶고 지구를 지키느라 바쁘던 마블 영웅들은 올해 개봉할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편을 나누어 '내전'을 치를 예정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성공적으로 관객의 뇌리에 안착하며 이야기를 퍼즐처럼 자연스럽게 짜 맞춘 결과다. 자막이 올라간 뒤 나오는 '쿠키 영상'으로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등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요소도 많았다.

반면 DC코믹스의 '어벤져스' 격인 '저스티스 리그'는 이제 막 시동을 걸기 시작한 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으로 등장인물 중 일부가 이제서야 만났고, 세계관과 캐릭터를 쌓아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시리즈의 서막을 알린 후 나아가기 위해 걸어놓은 시동이 조급함에 '급발진'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도 이 지점이다.

부디 제작진이 여유를 갖고 천천히 하나씩 단추를 끼워가길 바란다. '녹색재앙'으로 불린 <그린랜턴>으로 삐걱하긴 했지만, 여전히 DC코믹스의 캐릭터에 애착을 가진 팬이 많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작진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관객들도 단추가 제자리를 찾아가길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쏟아놓은 떡밥은 다 회수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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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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