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방송된 <SBS 스페셜>의 한 장면.

13일 방송된 의 한 장면. ⓒ SBS


2001년 발간된 소설 <마이너리그>는 1958년생인 네 남자 동창생의 삶을 횡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 치열한 경쟁을 겪어야 했다. 스무 살 무렵, 죽을 때까지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독재자의 '진짜' 암살을 목도했다. 혈기왕성한 20대의 끝자락엔 민주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먹고살 만하자 IMF가 터졌다. 그들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자 전쟁을 몸소 체험한 윗세대와는 다른 신세대였다.

은희경 작가는 소설 <마이너리그>에서 (하필 띠도 개띠인) '58년 개띠' 세대의 배경과 '멘털리티'를 유쾌하게 풍자하는 동시에 시대적 비애를 조명한 바 있다. 그들은 이제 '개저씨'라 불린다. '마 부장'이란 희대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윤태호 작가가 <미생2>를 준비하며 소리 내 읽었다던 <마이너리그>. 그는 15년 전, 자신들이 '개저씨'로 불릴 신산한 미래를 예상이나 했을까.

13일 방송된 <SBS 스페셜> '아저씨, 어쩌다 보니 개저씨'(아래 <개저씨>)는 신조어로 떠오른 이 '개저씨'와 '58년 개띠' 아랫세대를 고찰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저씨>는 '개저씨'란 용어가 떠오른 배경과 젊은 세대와의 갈등, 그들의 심리/사회적 배경과 세대 간 화해까지 모두 아우르려는 '지상파'다운 오지랖을 자랑했다. 원래 의도가 그저 변명이라면 모르겠지만, 최근 '세월호'와 '코피노' 문제를 연이어 다뤘던 <SBS 스페셜>의 문제의식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시 '개저씨'를 위한 변명?

 13일 방송된 <SBS 스페셜>의 예고 장면.

13일 방송된 의 예고 장면. ⓒ SBS


*개저씨 체크리스트
- 식당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에게 반말을 한다.
- 상대방을 잘 알기 위해 사생활을 묻는다.
-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가벼운 스킨십이나 성적 농담을 한다.
-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아랫사람에게 폭언 또는 폭행을 한다.
- 회식도 업무의 연장!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 직장후배에게 업무 외의 일을 시킨 적이 있다.
- 자신의 가부장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을 주변에게 강요한다.

방송에 소개된 '개저씨' 체크리스트다. 사실 이미 널리 알려진 '개저씨' 체크리스트는 훨씬 더 상세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들로 채워져 있다. 오히려 <개저씨>가 내세운 잣대가 완곡해 보일 지경이다. '개저씨'의 일반 용례는 '개념 없는 아저씨'가 아니라 '개 같은 아저씨'다. 그래서인지 <개저씨> 역시 '개저씨'의 극치와도 같은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 남성을 초반부에 소개하고 시작한다.

음식점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던 한 중년 남성. 임산부인 아내와 동석한 남편이 그에게 항의하자 다짜고짜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동시에 가한다. 알고 보니 그 '개저씨'는 대기업 임원이었으며 사과마저 변호사를 통해 전했다고 한다. 제작진 역시 '개저씨'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너무 심한 사례라고 판단했을까. 제작진은 빅데이터를 통해 '개저씨'의 연관어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를 '회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두 중소기업 사장의 현재를 통해 구체적인 '개저씨' 실태를 들여다보며 체크리스트에 걸맞은 행동이 있는지 확인했다. 하필 또 '58년 개띠'인 건축설비 회사 사장 한병용 씨와 프랜차이즈 전문 그룹 대표 김철윤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를 위해 <개저씨>는 젊은 여직원과 중장년 남성의 대립구도를 부각했다. 젊은 여직원들이 회식자리, 출퇴근 관리, 언어나 행동 습관 등등 중장년 남성들로 이뤄진 대표들이나 임원들의 행태에 대해 토로하는 장면을 주요하게 배치한 것이다. 관찰 카메라를 통해 회사 내 상황을 들여다보고, 직원들의 의견에 대한 사장과 임원들의 반론(?)도 곁들였다.

두 입장을 동등하게 다루며 견해차를 부각한 점은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 '개저씨'들의 해명과 철학을 들은 후에 어설픈 화해를 도모한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들은 지뢰밭처럼 방송 곳곳에 심겨 있었다.

'마 부장'을 연기한 송종학 배우가 직접 출연해 '개저씨'의 행태를 연기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실용적일 수 있다. 실제 사례들을 요약, 정리하고 '개저씨'의 행태를 확연히 전달하는 기능 말이다.

반대로 실제 사례나 '개저씨'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친 이들의 고통을 순화시키는 역기능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미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듯, '회사'로 공간을 한정 지은 출발부터가 그런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까.

결과적으로 아들과의 소통에 실패했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점차 관계를 회복 중이라는 작가 윤용인 씨의 사례를 소개하는 결말이 화룡점정이었다. 1시간 남짓한 방영시간 안에 세대 간 이해와 소통이라는 결말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오지랖이다. '개저씨'에 대한 주제에서도 한참이나 빗나갔다.

무엇보다 '남성 권력'이나 '군사 문화' 등 사회·역사적인 요인이나 최근의 '남성혐오' 현상의 근원을 배제한 채, '개저씨' 담론을 단순히 세대 갈등으로 귀결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수 아니었을까.

SBS의 '개저씨' 조명, 너무 일렀거나 혹은 안일했거나

 13일 방송된 <SBS 스페셜> '아저씨, 어쩌다 보니 개저씨'.

13일 방송된 '아저씨, 어쩌다 보니 개저씨'. ⓒ SBS


"마초, 부성, 연장자 숭배 사상이 맞물렸을 때, 한국은 이를 오랫동안 '벼슬'이라고 생각해왔고, 이 벼슬로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 앞에서 왕이 돼버린다. 만약 개저씨와 이성적인 토론을 하려 든다면, 당신의 논리는 '머리도 피도 안 마른 게 감히'라는 그들의 논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구세웅 스탠퍼드대학 교수가 작년 말 영문 뉴스 웹사이트 <코리아 엑스포제>에 게재한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Gaejeossi Must Die)란 기고글 중 일부다(관련기사 <개저씨, 그들은 왜 죽어야 하나>). 과격한 제목의 이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어렵지 않다. 요목조목 한국의 남성들이 중년을 넘어서며 '개저씨'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낱낱이 까발렸기 때문이리라. 그것도 이국어인 영어를 통해 말이다.

페미니즘이 보편화돼도 부족한 시기에 '여성혐오'가 창궐하는 시대다. <마이너리그>가 출간된 것이 15년 전이다. 그리고 '58년 개띠'들을 '개저씨'로 진화·발전시킨 한국 사회의 시스템은 오히려 공고해졌다. 15년 전 은희경 작가의 문제의식을 곱씹어 보자면, 곪은 부위가 터져버린 꼴이다.

'개저씨' 혐오가 비단 '여성혐오'의 반대급부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군사문화의 잔재나 가부장제의 찌꺼기를 비롯해 연관 지어 분석 가능한 요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하고 또 요구됐던 목소리가 이제서야 쏟아져 나온 것뿐이다. 너무 오랫동안, 아니 한평생 그 '벼슬'을 권리로 인식하고 또 그 권리를 누려온 특정 세대와 남성들에게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개저씨' 담론의 성찰과 분석은 한국의 양성평등과 권위주의 해체, 인권 감수성의 진작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담지 하고 있다. '개저씨' 혐오를 특정 인물군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나 공격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렇기에, SBS가 야심 차게 준비한 <개저씨>는 아직도 너무 이르거나 안일했다. 섣부른 '세대 간 소통'이란 '나이브'한 결말은 물론 '개저씨'에 대한 묘사도 의외로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연성화된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기가 이렇게 어렵다.

개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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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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