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리 와봐! 열정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열정 세 번 외쳐봐!" -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대사 중에서

이른바 '열정 페이'의 시대다. 젊은이들의 열정을 빌미로 그보다 더한 성과와 희생을 요구하는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에 박보영이 모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수습기자로 말이다. 그 수습기자의 이름은 도라희다.

그의 입장에선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모처럼 자기 나이(그는 90년생으로 올해 만 25세다-기자 주)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전작(<경성학교>) 때까지 병약한 소녀, 혹은 학생 역을 주로 맡아왔기에 내심 욕심이 났다"는 게 박보영의 속마음이다. 게다가 또래들의 고민을 작품을 통해 표현할 수도 있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보영이 "청춘 문제요? 제가 특출 나서가 아니라 지금 20대들이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나요"라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긍정적 열정, 부정적 열정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한 장면. 연예부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는, 청운의 꿈을 안고 언론사에 입사하지만, 곧 꼰대 같은 데스크를 만나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한 장면. 연예부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는, 청운의 꿈을 안고 언론사에 입사하지만, 곧 꼰대 같은 데스크를 만나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 NEW

영화 자체는 사회고발 내용이라기보단 오락적이다. 취업 전선에 내몰린 도라희가 말 그대로 앞뒤 꽉 막힌 꼰대 상사 하재관(정재영 분)을 만나면서 연예부 특종 기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스치듯 취업난을 겪는 20대의 아픔을 다루긴 했지만, 웃음을 강조하면서 각 인물이 겪는 황당한 상황들을 주로 다뤘다. 연예 기자의 세계를 진지하게 비판한 것도 아니다. 증권가 정보지에 좌우되는 모습을 그리는 등 다소 희화한 부분도 있다.

다만 박보영 스스로는 또래와 언론에 대해 꽤 생각이 깊어 보였다. "라희가 수습기자였기에 연예기자분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 게 맞겠다 싶어 따로 만나진 않고, 평소 느낀 모습대로 촬영에 임했다"면서도 그는 "취업이 1차 목표인 라희의 심정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촬영이 끝나고나니 내가 알고 있는 기자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각자 성향도 생각도 다를텐데 말이에요. 그리고 영화를 하면서 열정이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열정 페이 등) 열정이란 단어에 왜 이런 부정적 의미가 담겼을까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어요. 외부로부터 강요당하는 열정이 부정적인 거지, 스스로 외치는 열정은 (부정적인 게) 아니라고.

자발적인 열정은 긍정적이죠. '내가 이것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어!' 근데 외부에서 '넌 열정이 있으니 밥 먹을 시간 아끼면서 일해!' 이건 의미가 다르죠. 친구와도 얘기해봤어요. 우린 다들 열정에 대해 좋게 생각해요. 다만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걸 인질처럼 데리고 있으면서 우리 또래에게 요구하는 게 많으니 부정적이 되는 거죠."

<경성학교>, <오나귀>, <돌연변이>... 박보영의 고민

열정이라는 말을 박보영 스스로는 무겁게 지니고 있었다. 영화 <경성학교>를 찍은 직후인 지난해 말까지 자신의 재능과 의지에 대해 나름 깊이 고민하고 있던 사연을 전했다. "내가 재능이 없는데 내 욕심 때문에 연기자라는 직업을 쥐고있는 건가 생각했다"며 "언제쯤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할지 매번 우울감에 빠지곤 한다"고 말했다.

고민에 대한 답이 최근 박보영이 선보인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과 영화 <돌연변이>, 그리고 정재영의 한 마디였다. 드라마에서 박보영은 성욕에 솔직하면서도 발랄한 모습을 선 보이며 자신의 연기 폭을 넓혔다. 저예산 영화 <돌연변이>는 주연이 아닌 조연임에도 망설임 없이 택한 작품이다. 백수 키보드 워리어 역을 소화하면서 박보영은 판타지 코미디 장르에 적절히 녹아들었다.

"<돌연변이>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연기적 한계에 부딪혀 힘들었는데 마음을 다시 잡게 해준 작품이에요. 항상 즐거웠어요. '아, 내가 이런 재미로 연기하고 있구나!' 제 열정을 찾을 수 있었죠. <오 나의 귀신님> 역시 너무 (연기) 보폭을 넓히는 건 아닌가 했지만, 감사하게도 사랑받았어요. 좋은 에너지를 얻은 상태에서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를 할 수 있었어요.

다만 밝은 역할을 사랑해주시니 배우 면에서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대중이 제게 원하는 모습이 이런 건가. 나름 도전을 하고 싶은데, 제가 또 선을 넘는 도전은 못 했거든요. 이번에 만난 정재영 선배가 위축된 제 모습을 보시고 '쫄지 말라'고 했어요. 좀 건방져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좀 풀리기도 했어요. '그간 너무 혼자 작품을 책임만 지려 했구나, 함께 하는 분들에게 기대도 되는데 말이지'라면서요.

다작이 꿈이었는데 올해 이렇게 여러 작품으로 만날 수 있어서 좋긴 해요. 내년이 걱정이긴 하네요. 제가 잠시 작품이 비어있는 해가 있었잖아요. 내년에 아무 것도 없이 보낼 순 없어요! 어서 다음 작품을 정하고 싶어요(웃음)."

스물다섯 청춘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서 수습사원 도라희 역의 배우 박보영이 17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서 박보영은 함께 호흡한 정재영에게 애드리브(즉흥연기)를 전수받기도 했다. 19년 연기 경력의 정재영은 현장에서 각종 애드리브를 던졌다. 이를 경험한 박보영이 "선배의 여러 애드리브가 있었는데 제가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해주셨다"며 "애드리브의 비법을 알게된 거 같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 이정민


여러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도 답을 찾는데 주저함이 없는 모습이 청춘 그 자체였다. 본래 박보영은 혼자 쉬면서 자신을 충전하는 '집순이'기도 하다. 평소 일기를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최근엔 사진과 함께 단상을 남기기도 한단다. "소중한 순간의 바람과 햇빛이 느껴져서 좋다"며 그가 웃어 보였다.

또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니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기에 어떤 위로의 말을 하는 게 좀 그렇다"며 주저했다. "적어도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고충을 함께 털어놓기보단 주로 들어주는 숲과 같은 존재란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심은 곧 박보영이 뿌린 여러 씨앗 중 하나일 것이다. 연기자로서 여러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이런 인간적 매력이 언젠가 뿌리를 내리고 잎이 나 세상에 그 향기를 뿜을 날이 오지 않을까. 적어도 멀진 않아 보인다.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서 수습사원 도라희 역의 배우 박보영이 17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올해 바삐 달려온 박보영은 아직 차기작을 정하진 않았다. "작품이 없는 게 내심 불안하면서도 쉴 땔 잘 쉬고픈 마음도 있다"며 웃는 모습에서 일종의 여유도 느껴졌다. 박보영은 지난 2008년 영화 <과속 스캔들> 이후 상종가를 치다가 소속사와 법적 분쟁 등으로 약 4년 간 공백기를 갖기도 했다. ⓒ 이정민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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